과거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위장간첩 누명을 쓰고 처형된 이수근씨가 49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12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지난 1969년 사형이 선고된 이씨의 재심에서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공문서 위조 및 행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일부 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내렸다.
이씨는 북한 탈출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북한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다니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다 1969년 1월 위조여권을 이용해 홍콩으로 출국한 뒤 캄보디아로 이동하다가 중간 기착지인 베트남에서 붙잡혔다.
당시 검찰은 이씨가 위장 귀순해 북한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기밀을 수집하는 등 간첩 행위를 한 뒤 한국을 탈출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그는 바로 재판에 넘겨져 같은 해 5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두 달 뒤인 7월 사형이 집행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조사를 거쳐 당시 이수근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발생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위원회는 2007년 "당시 중정 수사관들이 이수근씨 등을 불법 체포·감금하고 수사과정에서 물고문과 전기 고문 등 가혹 행위를 했다"며 "사실 확인도 없이 졸속으로 재판이 끝났고 위장 귀순이라 볼 근거도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해 열린 재심에서 재판부는 "이씨가 영장 없이 불법으로 구금됐고, 수사관들의 강요로 허위자백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또 "첫 공판이 열리기 전날 대공분실로 끌려가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고, 재판 당일에도 중정 요원들이 법정을 둘러싸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만큼 당시 법정에서 한 진술도 강요된 것으로 의심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지령을 받기 위해 한국을 탈출했다기보다는 처음 이씨가 진술했던 대로 너무 위장 간첩으로 자신을 몰아붙이자 중립국으로 가서 편히 지내며 저술 활동을 하려 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전했다.
다만 재판부는 홍콩으로 출국하는 과정에서 위조여권을 행사하고, 미화를 환전하고 취득신고를 하지 않은 혐의는 유죄로 인정했다.
끝으로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낙인 찍히고 생명까지 박탈당하는 데 이르렀다"며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피고인과 유가족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