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개정된 것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시장에 혼란을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금산분리 등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정부의 전방위적인 압박에 한 재계 고위임원은 이같이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삼성생명이 갑자기 삼성전자의 주식을 내놓을 경우 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금융위원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삼성의 지배 구조에 관한 논란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의) 핵심적인 부분이고, 삼성도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법을 통해 강제적으로 시행되기 전에 회사 스스로 자발적이고 단계적인 방안 마련을 할 수 있으면 여러 가지로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 공정위원장도 다음달 10일 세 번째 재계와의 간담회를 통해 삼성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상황을 청취할 예정이다.
◆삼성생명, 20조 규모 삼성전자 주식 매각해야
정부가 정조준을 하고 있는 삼성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진 모양새다. 운신의 폭도 적은 데다 많게는 수십조원의 비용이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삼성에 요구하는 핵심은 순환출자 고리 해소와 금산 분리다. 쉽게 말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하라는 얘기다.
삼성생명은 현재 삼성전자 주식 약 1062만주(8.3%)를 보유하고 있다. 현행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취득 원가 기준으로 자산의 3%까지 계열사 주식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30년 전 주식 취득 원가(약 5만원) 기준으로 계산하면 삼성생명이 소유한 삼성전자 주식 가치는 5000억원대로 삼성생명 자산 283조원(2017년 말 기준)의 0.2% 정도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은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 가치를 취득 원가가 아닌 시장 가격으로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의 주식 가치는 약 27조5000억원(24일 종가 약 259만원 기준)으로 껑충 뛴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에만 100% 투자한다고 가정하더라도 2.33%(7조8000억원)의 지분만 보유가 가능하다. 나머지 5.94%는 팔아야 한다는 의미로 20조원에 가까운 규모다.
◆삼성 "뾰족한 대안이 없다"
이 때문에 최근 정부 정책에 발맞춰 삼성SDI의 삼성물산 주식 매각 등으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고 있는 삼성도 금산 분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삼성 입장에서는 총수 지배구조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고민이다. 금감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삼성전자 특수관계인 지분은 20.11%이며 개정안이 통과하면 14%까지 줄어들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경영여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총수의 리더십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며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50%가 넘는 지분을 외국인이 가진 상황이라 자칫 잘못하면 경영권 자체가 이들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삼성 계열사가 매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물산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는 것도 업계에서 거론되고 있지만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저촉될 수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A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 가치가 A회사 총자산의 50%를 넘을 경우 A회사를 지주회사로 강제 전환해야 한다. 또 지주회사가 되면 상장 자회사의 지분을 30% 이상 확보해야 한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지주회사 삼성물산(전자 지분율 4.65%)은 자회사인 삼성전자 지분 30%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수십조원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재계.학계 "지배구조 문제엔 정답이 없다"
재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배구조는 일종의 문화이지, 정답이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면서 “최근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사퇴 사례, 삼성과 현대차의 지배구조 문제 등에서 정부의 개입이 과도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기업이 몇 없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혁신성장실 실장은 “지배구조는 기업의 경영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시스템"이라며 "정책적인 목적으로 방향을 정해놓고 그 쪽으로 가라고 기업들을 내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의 취지대로 바꿨다가 기업들의 경영성과가 나빠질 경우 누가 책임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