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근세의 자랑거리 할힌골 전투
몽골인들에게 근세 들어 가장 자랑스러운 일을 꼽으라면 1,939년 일본의 관동군과 벌인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륙장악을 위해 기세를 떨치던 일본과의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 할힌골 전승기념탑]
그래서 이 전투에서 승리한 9월이면 지금도 승전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들이 펼쳐진다. 전투의 현장이었던 할힌골에는 당시의 승전을 기념하는 전승탑(戰勝塔)이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그 곳 할힌골 박물관에는 당시 전투의 기록과 사진 그리고 전쟁 유물들이 비교적 충실하게 정리돼 있다.
[사진 = 전승 기념탑 조각상]
박물관 안 숙소에서 이틀이나 묵었던 필자는 그 곳에 비치된 전쟁 영웅들의 사진과 조각상 그리고 당시 전투상황을 재현한 미니어처 등에서 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었다.
▶ 넓은 땅, 적은 인구 할힌골
[사진 = 할힌골 솜]
할힌골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천 Km이상 떨어진 몽골의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부 최대도시 초이발산에서도 4백 Km 정도 떨어져 있다. 초이발산에서 할힌골에 이르는 지역은 높은 산을 물론 높은 구릉 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평한 초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넓은 초원지대에는 게르 하나 가축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금도 빈 땅으로 남아있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산과 구릉이 없는 초지에서는 가축을 기르지 않는다. 가축이 달아나도 찾을 길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할하강을 끼고 있는 할힌골 일대 평원지대는 과거 칭기스칸이 케레이트족의 공격을 피해 도주했다가 이곳에 머물면서 푸른 군대의 군사 체계인 천호제를 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진 = 할힌골 근처의 평원]
민가가 없기 때문에 초이발산에서 할힌골을 찾아가면서 일행은 중간에 몽골 군부대 숙소에서 하루 밤을 묵고 할힌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할힌골은 그 면적이 2만 8천 제곱Km에 달한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면적 보다 더 크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몽골인은 3천명 남짓이다. 빈 땅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소련군을 내세운 對日 대리戰
할힌골(Khalkhin Gol) 전투는 1,939년 5월에 시작됐다. 엄밀히 말하면 할힌골 전투는 몽골과 일본 사이의 전투라기보다는 몽골이 소련군을 끌어들여 전면에 내세운 대리전이었다. 그러니까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의 전투에 몽골이 힘을 보탰다는 설명이 정확한 상황일 것이다.
[사진 = 대일(對日) 전승 기념탑]
그래도 여전히 일본군을 눌렀다는 자부심은 몽골인들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몽골에서는 ‘할힌골전투’, 일본에서는 중국 측의 지명을 따서 ‘노몬한(Nomonhan)사건’이라 부른다.
▶만주장악 위한 만주사변
[사진 = 만주사변 일으킨 일본]
만주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다. 중국 국민당정부의 세력 확장과 소련의 외몽골 장악 등에 자극을 받은 일본 관동군은 全만주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그 구실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심양(奉川) 외곽의 유조구(柳條絿)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웠다.
그 것을 트집 잡아 폭격을 가하고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를 몰아갔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초까지 만주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같은 해 3월,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한 뒤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게 된다.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에 따라 조사에 나섰지만 열하성(熱河省:승덕)을 점령한 일본이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정국은 정당내각에 종지부를 찍고 더욱 군국주의 길로 나서게 된다. 이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었다.
▶ 내몽골에 일본괴뢰정부
만주국의 본질은 일본의 괴뢰정권이었지만 다민족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관동군은 영내 몽골계 거주민의 존재를 고려해 흥안성(興安省)를 신설하고 제한적인 자치를 인정했다. 당시 내몽골은 만주국의 등장과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중화민국 정권의 허약성을 지켜보면서 남경 정부에게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 = 뎀추크 동롭(덕왕)]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뎀추크동롭(덕왕:德王)이었다. 그의 존재를 주목하고 있던 집단이 바로 화북지방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1,937년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은 내몽골 지역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뎀추크동롭을 지원해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939년에는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괴뢰정부였던 진북(晉北: 산서성 북부)과 찰남(察南: 차하르성 남부)를 가담시켜 몽골연합자치정부를 발족시키고 수도를 장가구(張家口)에 두었다. 그래서 이름만 몽골을 달았지 사실상 한족의 인구 구성 비율이 더 높아진 일본의 괴뢰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일본공세에 위기의식
[사진 = 몽골 중국 국경지대 평원]
이러한 일본의 공세는 외몽골과 소련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1,921년 인민혁명 후 몽골에 들어왔던 소비에트군은 일단 철수했지만 1,936년 두 나라 사이의 상호원정의정서에 기초해 다시 몽골에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몽골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과 몽골 사이에는 국경분쟁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국을 내세워 서진(西進)하면서 일본 관동군과 몽골 사이에는 국경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경 분쟁이 비화된 것이 바로 할힌골 전투다.
▶국경분쟁에서 비화된 전투
[사진 = 유목민의 말사육]
할힌골 지역은 지금도 몽골의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 중국과의 말썽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유목민들이 가축을 따라 국경을 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1,939년 5월, 몽골군 기병 80여명이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할흐강을 건너갔다가 일본군과 충돌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본군은 몽골 병사들이 국경선을 넘어 온 것으로 간주하고 공격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몽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시켜 일본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당시 소련군 지휘관은 페클렌코(Фекленко)로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모스크바로 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만주에 주둔한 항공기와 전차 그리고 병력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한해 전에 소련과 만주국의 국경선 지대의 장고봉(張鼓峰)에서 한차례 격돌했던 일본군이 다시 소련군과 정면 대결하게 된 것이다. 할힌골 전투는 그렇게 시작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