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05] 몽골은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가 되나? ③

2018-04-02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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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중국이 주(主), 몽골은 종(從)
코민테른은 중국의 정세에 개입해 국공합작을 유도한 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의도는 중국의 공산혁명을 최종 목표로 두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공산당은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국공합작을 유도해 국민당 속으로 파고 들어가도록 만든 뒤 국민당을 장악하는 수순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사진 = 공산당이 탈취한 국민당 무기]

그 것을 발판으로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소련으로서는 중국의 사태가 주(主)였고 몽골의 상황은 종(從)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공산혁명이 성공해 중국에 사회주의 연방정부라도 세워진다면 굳이 몽골의 상황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장개석의 반공(反共) 쿠데타
그러나 중국의 상황은 소련이 기대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다음해 손문이 북경에서 사망했다. 이 때 국민당 내부는 좌우파로 분열된 상황이었다.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간 공산당원들은 상당한 요직을 차지해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이때 중앙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됐다.
 

[사진 = 모택동과 장개석]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와 연합해 우파를 누르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장개석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1,926년 7월 국민혁명이라 불리던 북벌(北伐)에 오른 장개석은 군벌들을 제압하며 군사행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 상황에서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국민당 우파와 노선을 차별화 한 뒤 함께 손을 잡고 정부를 무한(武漢)으로 이전시켰다. 무한 정부가 자신을 견제하며 민중운동을 급진적으로 몰아간다고 판단한 장개석은 좌파와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 등 외세의 입김까지 작용하면서 1,927년 4월 장개석은 상해에서 반공(反共) 우파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숙청에 나섰다. 이 때 공산당원의 4/5 정도가 살해되고 만 명 정도만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차 국공합작의 결렬

[사진 = 1930년대 장개석]

장개석이 남경에 국민당 정부를 세우자 무한의 국민당 좌파도 공산당과 결별하고 여기에 합류했다. 이로서 3년 7개월에 걸친 1차 국공합작은 자동적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사진 = 모택동(1930년대 초)]

이후 공산당은 모택동을 지도자로 강서성(江西省)에서 중화소비에트를 출범시켜 남경정부에 대항하고 나섰지만 장개석의 여러 차례 토벌 작전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서 사실상 지하활동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소련으로서는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일단 접어야했다.
 

[사진 = 중국 공산당 대장정]

중국에서는 이후 국민당의 토벌작전으로 공산당은 1,934에서 1,935년 사이 고난의 대장정을 거치게 된다. 1,937년 노구교사건에서 비롯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항일투쟁을 위해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이때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동등한 입장에서 정책 협정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양측은 다시 생사를 건 내전에 돌입한다.
 

[사진 = 장개석]

결국 장개석의 국민당은 1,949년 타이완으로 건너가고 중국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공산당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기사회생하게 되지만 1,920년대 중반에 소련으로서는 앞날을 내다보기에는 당시 상황이 너무 비관적이었다.

▶몽골 급진 사회주의 개혁 시동
1차 국공합작의 결렬은 내몽골인민혁명당까지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코민테른은 내몽골에서 민중 봉기를 유도했지만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유지돼온 코민테른의 지도방침이 파탄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외몽골에 대한 정책 방향을 확정지어야했다.
 

[사진 = 1930년대 울란바토르]

중국에서 혁명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몽골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정세와 분리해 개별적인 국가 형태로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그 때까지 비교적 느슨한 형태로 놓아두었던 외몽골에 대한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물론 소련의 선택은 ‘극좌(極左)노선’이었다. 급격한 사회주의 개혁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숙청 바람
우선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담바도르지를 비롯한 지도부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신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을 비롯한 젊은 사회주의자들로 그 자리를 대거 채웠다. 이 때 민족이라는 개념은 소련에게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개념을 건너뛰어서 계급의식을 겨냥한 인민연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소련의 인민과 몽골의 인민의 연대를 통한 공동 목표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내세웠다. 자연히 민족주의는 반동사상으로 취급을 받았고 민족주의자는 줄줄이 숙청됐다. 숙청의 바람이 전 분야에 걸쳐 거세게 몰아닥쳤다.
 

[사진 = 몽골의 사유재산 몰수]

이전의 귀족과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이 거센 바람의 가장 전면에 서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몰수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소련과 궤를 같이 한 좌파개혁

[사진 = 크렘닌의 스탈린]

하지만 이 시기 소련도 체제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레닌이 죽은 후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 투쟁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탈린이 두 차례의 권력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단독 지배권을 확보하는 시기는 1,929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 친구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이해 12월 스탈린의 50회 생일행사가 전 소련의 축하 분위기 속에 진행되면서 비로소 그의 자리가 확고해졌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프라우다’는 이 때 처음으로 스탈린을 레닌의 계승자로 불렀다. 따라서 비록 몽골에서 급격한 사회주의 개혁을 주도한다는 소련의 방침은 분명했지만 그 것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끌어 나갈 상황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위치가 확고해진 이후에야 몽골의 사회주의 개혁도 비로소 소련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추진된 것이 바로 유목민의 집단화 작업과 종교 탄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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