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연맹 속에 포함되지 않은 몽골
[사진 = 카자흐 알마아티]
1922년부터 시작된 소비에트 연맹 결성 작업은 2년 동안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을 그 틀 속으로 편입시키면서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미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몽골도 소련에 가입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몽골은 왜 그 속으로 편입되지 않았을까? 몽골의 경우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걸림돌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민테른, 중국 1차 국공합작 유도
[사진 = 중국 공산당 홍군 지도자(뒷줄 첫째가 모택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레닌이 기대했던 유럽에서의 혁명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비에트가 눈을 돌린 곳이 중국이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소비에트가 중국 사태에 개입하고 나섰다.
코민테른은 1920년 2차 대회에서 레닌이 제기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근거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국공합작 노선을 제기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세계의 모든 민족과 국가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대중이 연대와 연합에 자발적으로 힘쓰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승리는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없다"는 것이 이 테제의 핵심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 혁명을 이루기 위해 국민당과 제휴하겠다는 입장을 보인데 대해 반제(反帝)와 반(反)봉건 노선을 취해온 국민당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서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1차 국공합작이다.
국민당은 1,924년 1월 연소(聯蘇 :소련과 연합), 용공(容共:공산당과 제휴), 농공부조(農工扶助: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원조) 등 3대 정책을 채택했다. 이것이 1차 국공합작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은 당 대 당(黨 對 黨)의 합작은 아니었다.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국공합작을 이끈 인물이 코민테른의 대표 마링이었다. 그는 국민당이 여러 계급의 연합정당인 만큼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더라도 국민당과 합작할 것을 공산당에 종용했다.
[사진 =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모택동(1923년)]
그래서 공산당원은 국민당에 입당해 내부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중앙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세 명이 공산당 소속이었고 후보위원 17명 가운데 모택동(毛澤東)을 포함한 7명이 공산당원이었다.
▶몽골 운명, 국공합작이 변수
그러는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회복됐다. 당시 소련으로서는 국공합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몽골에 대한 상황을 조급히 결정지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 몽골과 러시아 회담 대표(몽골 국립박물관)]
그러니까 소련은 몽골의 상황을 일단 과도기로 파악하고 확실한 미래상을 설정해 놓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의 국공합작의 성공 여부에 따라 몽골의 운명도 결정 날 공산이 컸던 상황이었다. 만일 국공합작이 결렬되지 않고 성공을 거둬 ‘중화연방’ 같은 정치체제가 이루어졌다면 몽골이 거기에 포함됐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당시 몽골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당 중앙위원장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던 담바도르지는 그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소련이 몽골에 대해 취한 자세는 애매모호했다. 앞 뒤 과정을 살펴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사진 = 몽골국가 인장(몽골 국회의사당)]
1921년 몽골의 인민 정부가 들어선 다음 소비에트는 몽골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중국과의 국교교섭 과정에서 몽골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자 몽골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승인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담은 중․소 대강협정(大綱協定)을 1,924년 5월 체결했다. 이는 분명히 외교적으로 모순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소련은 동아시아 정세 자체를 과도기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당국자나 코민테른 관계자는 이를 그다지 모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체제, 몽골인민공화국 출범
[사진 = 몽골 인민당 인장]
그런 흐름 속에서 1924년 몽골의 국가원수인 젭춘담바 쿠툭투가 사망했다. 같은 해 11월 몽골은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인민당도 몽골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국가 운영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사진 = 울란바토르 외곽지역]
후레의 지명이 현재의 울란바토르로 바뀐 것도 바로 이때였다. 울란바토르는 붉은 영웅이라는 의미이다. 후레의 이름이 울란바토르로 바뀐 것은 그들 민족의 영웅 수흐바타르를 일컫는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 울란바토르 전경]
그 때까지도 완만한 속도이기는 하지만 사회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과거의 체벌을 금지하고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새 법이 만들어졌다. 영주들이 유목민들로부터 받는 세금을 폐지했다. 귀족들의 지위와 봉급이 몰수 됐다. 지방정부 구성을 위한 민주 선거도 실시했다.
몽골의 상업과 산업은행이 세워지고 정부산하 경제위원회가 개설됐다. 몽골 인민공화국의 출범으로 이러한 개혁에 속도가 더 붙으면서 점차 사회주의국가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래서 1,924년은 몽골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이해에 일어난 일들을 차례로 정리하면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시작되고 다수의 코민테른 요원이 여기에 참가했다. 이어서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회복된다. 여기서 소련은 중국의 외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다. 또 외몽골에서는 코민테른의 지도아래 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 의미 있는 1924년
[사진 = 레닌의 장례식]
이해가 중대한 의미가 있기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이해 1월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이 죽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죽기 전에 난폭한 성격의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우려했지만 레닌의 유서마저 손에 넣은 스탈린이 유리한 고지에 서있었다.
[사진 = 레닌묘 옆에서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는 1927년 스탈린이 경쟁자인 트로츠키를 축출한데 이어 1929년 우파까지 제거하는 등 단독 지배권을 굳힐 때까지 권력투쟁이 이어진다. 중국도 국공합작이 시작된 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아무튼 소련과 중국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몽골의 장래는 당시로서는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한 현상은 내몽골에서도 나타났다.
▶국공합작 결렬로 사라진 통합의 꿈
1911년 복드칸 정권이 독립을 선언할 때 제외됐던 내몽골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몽골의 몽골인민공화국과 연락을 취하고 코민테른과도 접촉했다.
[사진 = 중국 시진핑주석, 장가구 방문]
그 결과 1925년 장가구(張家口)에서 내몽골인민혁명당이 결성됐다. 내몽골인민혁명당의 큰 목표중의 하나도 ‘대몽골주의’, 즉 통합된 몽골을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 점은 외몽골의 목표와도 상통했다. 내외몽골의 통합은 복드칸 정권은 물론 몽골인민당의 강령에서도 장기적인 전망으로 언급된 부분이었다.
[사진 = 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장가구]
양측 모두 정치적 상황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몽골의 범위를 가능한 한 넓혀 놓는 것이 장래를 위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내몽골 지역에서의 국공합작은 국민당과 내몽골인민혁명당 사이에 협조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론 내몽골의 인민혁명당은 외몽골의 인민혁명당과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제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1927년 1차 국공합작의 결렬은 모든 것을 흩트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