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30일, ‘달래씨와 나의 첫 만남은 1963년 음력 8월 12일 해거름에 이뤄졌다’로 시작하는 ‘오늘도 안녕! 달래씨’를 본지에 실었었다. 저 아랫녘 섬에서 일평생 까막눈 진달래씨가 4남 2녀 중 막내 아들인 나를 키우고 가르친 사연이었다.
“나는 왜소하다. ‘노가다’라도 할 수 있을까 싶게 왜소하다. 하여 달래씨가 죽을 힘으로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때의 내 인생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 달래씨가 이제 시나브로 멀어져 간다. 따라 가려야 갈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 간다. ‘막둥아! 새끼들 잘 키우고 각시랑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역력한 오매불망을 내 가슴에 수북이 내려놓고 휘적휘적 멀어져 간다. 바닥까지 타들어간 촛불처럼 위태위태 출렁이며 아득해져 간다. 나는 그런 달래씨, 나의 엄마에게 ‘미안해요. 사랑해요. 고마웠어요’란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었다.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안 조카는 친구들에게 ‘내 생이 끝나는 것 같다.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엄마에게는 차마 ‘나 이제 죽을 것 같다’는 포기 의사를 내비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엄마가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서.
형수 역시 아들의 운명을 예감했다. ‘너 때문에 행복했다. 편히 잘 가라.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니”란 말이 불쑥불쑥 치밀었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형수는 조카로부터 ‘엄마, 사랑해요’란 마지막 말을 듣고 싶었건만 그러지 못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고야 말았다.
3주 전 고향에 있는 형이 전화를 했다. 엄마 때문이었다. 일주일이 흘렀다. 새벽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별을 보자니 ‘엄마가 지금 나를 기다리시는구나’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날이 밝자 고향에 내려갔다. 병원 침대에 누운 엄마는 물도 삼키지 못해 주사기로 연명하고 있었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어쩌다 가끔 눈을 힘들게 뜰 뿐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귀는 열려 있을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엄마, 막내아들 왔소. 엄마가 사랑하는 보기 왔소.” 나는 가녀린 노인의 손을 꼭 잡고 귀에다 속삭였다. 그렇게 몇 번을 했을까, 엄마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나를 응시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말도 들렸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 귀에 여러 번 속삭였다.
“엄마, 사랑해요. 나에게 엄마가 돼준 것 고마워요. 엄마 은혜로 가족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엄마 은혜 끝까지 잊지 않을게요. 엄마, 나 걱정하지 말고 잘 가요. 가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큰형이랑 만나세요.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웠어. 엄마, 잊지 않을게···.”
그 순간 엄마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눈을 감고 힘들게 숨을 끌어 쉬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짧은 외마디가 숨소리에 섞여 새어나왔다. 두 번이었던 것 같다. ‘사랑해’였다. 분명 세 글자의 말이었고, 첫마디가 ‘사’였고, 입술 모양이 ‘사랑해’였다. 나는 엄마가 ‘사랑해’라고 마지막 말을 한 것으로 믿어 버리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엄마는 떠났다. 엄마를 묻을 때 형이 ‘닭띠 출생자는 안 좋으니 하관을 보지 말고 등을 돌리라’ 했다. 나는 그새 아들에게 ‘등을 돌리라’ 말을 하고 있었다. 순정한 사랑은 그렇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엄마가 그렇게 떠났던 날은 오래전 큰형이 떠났던 바로 다음 날이다. 제삿밥 드시러 온 큰형이 ‘엄마, 이제 나랑 갑시다’ 했던 것일까. 형님, 엄마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