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저서 '역사철학'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문화 기원을 논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신의 뜻을 어긴 죄였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스스로 내린 최초의 결정이고 인간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에덴동산에 계속 머물렀다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문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초의 인간과 인류의 조상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사냥과 채취를 하고 물과 식량을 찾아다니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농사 짓는 사람은 촌락에, 비농경인은 도시에 정착하면서 인간의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통치계급, 상인, 군인 등 계급계층이 분화되었고 사회조직도 세분됐다. 인류의 역사는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켜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만든 최초의 생활공간인 도시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인간의 땀과 노력, 기술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시는 문화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사는 주거공간, 농산물과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 시민들이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공공장소 등이 차례로 만들어지고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길과 여러 가지 생활 편의시설들이 만들어지면서 도시는 기능적으로 분화하고 발전하게 된다.
하드웨어와 인프라의 측면에서 보면 도시는 테크놀로지로 구성되지만 도시민이라는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도시는 문화로 구성되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요컨대 도시는 과학기술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삶에 수용되면 문화가 되고, 문화는 세월을 거치면서 인간 삶의 역사가 된다. 도시에도 삶과 죽음이 있다. 생명체처럼 발생하고 성장, 발전하며 때로는 소멸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부쩍 도시재생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재생이란 낡은 것,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것을 뜻한다. 근대화·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추진됐던 개발이나 재개발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역전문가 윤주는 최근 발간한 '도시재생 이야기'를 통해 도시라고 하면 초고층 빌딩숲이나 랜드마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나와 이웃의 어제와 오늘이 담긴 삶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속도의 향상, 규모의 증강 등의 목적으로 무조건 철거하고 재개발하는 방식은 자원·인구 문제 등으로 인해 한계를 맞았고, 이제는 도시가 유지해온 맥락을 지키고 주체를 분명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성의 관점에서 현재의 장소성, 예술성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도시재생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20여년간 산업유물로 방치됐던 고가철도와 역을 공중정원 가로수길로 바꾼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 화력발전소의 내부와 외관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만든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 19세기 대영제국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양조장들을 리노베이션해 박물관·카페 등으로 새롭게 일군 캐나다 토론토의 디스틸러리 지역 등이 장소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공간을 재생한 모범사례로 제시된다. 만약 도시재생을 기술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냥 때려 부수고 다시 재개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도시공간은 과학기술 위에 지어졌지만 인간이 살면서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고 지나온 삶의 흔적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인문학적 공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현대도시의 인프라를 만든 것은 과학기술이지만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도시 속에 인간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도시에 불과하다. 기술로 지어진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문화다. 인간이라는 주체의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봐야 과학기술도, 문화도 지속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