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스키타이 옛 영토 차지한 몽골
[사진 = 바투 초상화]
몽골 연합군이 본토로 철수하면서 바투의 군대도 1243년 겨울, 볼가강 하류의 본영지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정벌 결과로 주치 일가의 울루스는 이제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게 됐다.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종주권은 물론 킵차크와 볼가르 지역을 모두 통치지역으로 손에 넣게 됐다.
[사진 = 볼가강]
이 지역은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부터 돈강, 볼가강 유역 그리고 카프카즈 일부지역까지 포괄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말하자면 고대 유목민족 스키타이가 지배했던 거의 모든 지역이 이제 몽골이 지배하는 땅이 된 것이다. 더욱이 오고타이가 죽은 뒤 2년 동안 대칸의 부재 상태는 바투에게 원정의 결과로 얻은 이 지역을 고스란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게 해줬다.
▶볼가강 하류의 본영지
이제는 한 가문의 형태로는 그 넓은 영토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독립된 형태를 취하는 국가적인 체제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아래 바투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이름을 딴 킵차크한국을 세웠다. 이 킵차크한국은 물론 몽골본토의 대칸에게 형식적으로 복종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조직의 성격이나 운영형태를 보면 독립된 하나의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바투는 계절에 따라 볼가강을 오르내리면서 거처를 정했다.
[사진 = 하늘에서 본 몽골 초원]
그가 주로 체류했던 볼가 강 하류지역의 본영지였다. 나중에 바투의 동생 베르케는 본영지를 볼가 강변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라이라는 사실상 킵차크한국의 수도를 만들어 낸다. 그 곳은 위치로 따지자면 오늘날의 볼고그라드, 소련 시절에 스탈린그라드라고 불렀던 도시 근처의 강변 초원지대다. 수도로 알려진 사라이는 정해진 지명이 아니라 킵차크한국의 지도부가 자리 잡은 곳을 일컫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황금으로 치장한 오르도
[사진 = 몽골 초원의 말]
'황금 오르도', 러시아어로 잘라또에 오르도(Золотое Ордо)라고 부르는 곳에 기거하는 바투가 이 연합체의 최고 통치자였다. 그의 형인 오르다가 가문의 가장 연장자이기는 했지만 병약한데다 성격까지 소심해서 사실상 주치일문을 이끌어갈 모든 역할은 둘째인 바투가 맡았다. 오르다 역시 그 점을 인정했다. 바투가 기거했던 오르도의 이름을 따 킵차크한국을 금장한국(金裝汗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투는 침대 크기의 높은 의자인 보좌에 앉아 있었다. 그 보좌는 전부 금으로 입혀져 있었다.바투의 가까이에는 그의 아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앉아 있고 다른 남자들은 귀부인의 좌우에 앉아 있었다. 입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큰 금잔과 은잔이 몇 개 놓인 긴 의자가 있었다. 바투의 얼굴은 약간 불그스레했다."
볼가강 하류 바투의 본영지에서 그를 만났던 루브루크가 본 황금 오르도 안의 모습이다.
▶소수의 몽골인이 지배한 투르크인 집단
[사진 = 유목민 가족과 취재팀]
킵차크한국은 분명히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몽골제국의 일원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실체는 소수의 몽골인들이 다수의 킵차크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특이한 형태였다. 굳이 말한다면 몽골-투르크 유목민족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주치는 아버지로부터 4개 천호를 받았다. 그러니까 4천명의 몽골인들이 주치 울루스에 소속됐다는 얘기다. 러시아 유럽 정벌 과정에서 다소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각 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면서 정복지에서 흡수한 많은 투르크계 킵차크인들을 거느렸다. 그래서 킵차크한국은 소수의 몽골인이 지배하는 다수의 투르크계 집단이 된 것이다.역시 루브르크의 기록이다.
"우리는 동쪽으로 여행하면서 하늘과 땅, 간혹 볼 수 있는 바다 그리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쿠만(Kuman)인들의 무덤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 외로운 공간에 몽골인들이 지휘하는 투르크인의 군대가 돌아 다녔다."
쿠만은 비잔틴 사료에 기록된 투르크 종족을 일컫는 말로 킵차크-투만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급속히 투르크화 돼 간 몽골인
[사진 = 타타르의 러시아 지배(18세기 영국제작)]
바투 일가의 몽골인들은 몽골 본토와 분리돼 사실상 별개의 집단으로 이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서 이들 투르크계통의 종족들에게 흡수 동화되면서 급속히 투르크化돼 갔다. 바투가 숨진 뒤 킵차크한국을 맡은 동생 베르케는 종교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후 서북 유라시아 지역은 투르크계 이슬람 지역으로 변해간다. 그렇다고 해서 킵차크한국이 몽골이 아니라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는 것이 몽골제국이 지닌 특성이었고 러시아로부터 타타르라 불리는 이들도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진 = 러시아군 몽골식 무장]
바투의 러시아 정벌이후 16세기 중반 모스크바의 이반 4세가 아스트라한국과 카잔한국을 흡수하면서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단절시킬 때까지 240년 동안 킵차크한국은 크고 작은 지역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권력의 이양 과정도 단순하지 않다. 그 복잡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대신 어느 정도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킵차크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지배 방식과 그 것이 러시아의 국가 형성이나 미래에 끼친 영향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 흐름을 중심으로 러시아 역사가 ‘타타르 이고’(Татарское Иго) 즉, ‘타타르의 멍에’로 규정하고 있는 그 과정을 짚어 보자.
▶간접통치로 공국 다스려
[사진 = 몽.러 전승기념비(울란바토르 자이산)]
킵차크한국이 러시아 공국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직접통치가 아니라 느슨한 간접통치 방법이었다. 각 공국에게 통치권을 인정하는 야를르이크(Ярлык)라는 허가장을 주는 대신 이들로부터 재산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택했다. 각 통치지역에 대한 징세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실태파악이 필요했다.
[사진 = 초원을 달리는 취재차량]
그래서 바투는 1247년 몽골제국 전체가 통치지역에 대한 호구조사를 실시한 것에 때맞춰 루시 지역에 대한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 또 1257년에는 루시 지역에 대한 별도의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두세와 농지세 상업세 등을 결정했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 각 공국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이를 바치지 않는 공국에 대해서는 징세관이 무장부대를 이끌고 나타나 무력을 행사하거나 주민을 노예로 팔아먹는 등 징벌을 가했다. 공후들은 우선 통치 허가장을 받기 위해 값비싼 선물을 들고 사라이를 방문하곤 했다. 바투는 공후들 가운데 한사람을 대공으로 임명했다. 대공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몽골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