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3] 유목민이 왜 성(城)을 쌓았나? ①

2017-10-0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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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정착도시 건설의 필요성 대두
유목민들은 통상 머물러 사는 정착지역이 없이 살아왔다. 가축의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것이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주문명권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항구적인 도시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그들의 집단이 커졌을 때에는 본영(本營)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지역을 통치의 중심지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정주권의 사람들이 만든 수도(首都)라는 이미지를 가진 정착 도시는 적어도 칭기스칸 시대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정주 문명권까지 통치 지역으로 소유하게 된 대몽골 제국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통치지역이 넓어져 중앙집권화가 요구되면서 새로운 정치와 행정 경제 중심지의 건설이 필요해진 것이다.
▶유목민 최초 정착도시 카라코룸(karakorum)

[사진 = 카라코룸 일대 초원]

"제국은 말 위에서 건설됐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 야율초재가 오고타이에게 했던 말처럼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다. 몽골제국의 최초의 정착 도시 카라코룸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금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오고타이는 특히 중국의 경우를 보면서 그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는지 모른다. 오고타이는 1235년 몽골고원의 중심 지점에 도성을 짓는 일에 착수했다. 몽골인들이 최초로 가지는 그들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도성이 세워진 곳은 카라코룸! 카라코룸은 검은 자갈밭이라는 뜻으로 오르콘 강변의 초원지대에 세워진 도시였다. 이미 15년 전인 1220년, 1차 금나라 정벌을 끝낸 칭기스칸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본영중의 하나로 삼았던 곳이었다.

▶사방으로 통하는 몽골 한가운데 땅

[사진 = 이흐(大) 몽골산 (몽골 국토 중앙에 위치)]

그 땅은 몽골 고원의 동서남북 교통로가 교차하는 몽골의 한가운데였다.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땅의 중심부로 여기고 있는 이흐(大) 몽골산은 카라코룸에서 불과 수십 ㎞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땅은 역사적으로도 유목민들에게 유서 깊은 땅이었다. 몽골 이전에 흉노와 돌궐 그리고 위구르족 등 몽골 고원을 다스렸던 유목민들의 본영이 자리 잡았던 곳이었다.
 

[사진 = 카라코룸 안내판]


지금도 주변에 남아 있는 위구르족의 카르발가순城의 흔적과 돌궐의 비문(碑文) 등이 그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오고타이가 도성을 짓기로 한 카라코룸은 역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나 대몽골제국의 수도로서 안성맞춤인 땅이었던 것이다.

▶대칸의 거처 3층 만안궁

[사진 = 카라코룸 성(城)]

카라코룸에 도성을 세우는 일에는 중국과 서하 등 몽골의 점령지에 있던 건축가들은 물론 프랑스인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당시 카라코룸성의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동안의 기록과 발굴조사 등을 바탕으로 사라져 버린 성을 복구시켜보면 당시 성의 모양과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북 2.5㎞, 동서 1.5㎞ 정도 크기의 역(逆)사다리꼴 모양으로 세워진 카라코룸성의 정면에는 대칸의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대칸이 기거하는 3층 건물 만안궁(萬安宮)이 나타난다. 6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길이 120m, 폭 80m의 만안궁의 중앙에는 3층 어전(御殿)이 세워졌다.

▶네 가지 술이 나오는 은(銀)나무

[사진 = 만안궁 추정도(그래픽 복원)]

[사진 = 은나무(그래픽 복원) ]

 
그리고 만안궁 전면의 왼쪽 편에는 은으로 만들었다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금 세공사인 기욤 뷔쉬에가 만들었다는 은 나무에는 네 마리의 사자머리가 조각돼 있었다. 각 사자의 머리에서는 포도주와 마유주, 곡주(쌀로 빚은 술: 테라키나) 그리고 벌꿀 술이 항상 쏟아져 나왔다고 당시 카라코룸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수사(修司) 루브르크가 전하고 있다.
 

[사진 = 만안궁과 은나무 ]

루부르크는 대칸으로부터 네 가지 술 가운데 무슨 술을 마시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칸이 주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마시겠다고 대답하자 쌀로 빚은 술을 주었는데 백포도주 냄새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대칸은 오고타이가 아니라 네 번째 대칸 뭉케였다.

▶다민족 다문화 국제도시

[사진 = 카라발가순 유적]

만안궁의 주변에는 궁정 관리들의 저택과 한족 공장 구역 등이 들어섰다. 특히 카라코룸으로 들어서는 네 개의 문 주변에는 각종 시장이 들어서 세계 각 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활발한 상품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불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사원도 세워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카라코룸은 몽골인들 만을 위한 도시라기보다는 국제적 성격을 띤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복원시켜본 카라코룸의 모양은 한마디로 세계제국을 이룬 몽골인이 초원에 세운 인공적인 국제 도시였던 것이다. 건물의 형태나 도시의 모양은 아무래도 중국의 그 것을 닮았던 것 같다.
 

[사진 = 카라코룸 발굴 작업]

그 때까지만 해도 도시가 정주문화권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성을 건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그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몽골의 정치와 행정 그리고 경제를 집중시킬 수 있도록 일부러 건설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이 카라코룸은 다민족(多民族)과 다문화(多文化)가 뒤섞인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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