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거주 중국인을 뜻하는 ‘화교(華僑)’는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단어다. 그러나 화교란 존재가 한국 사회에서 크게 이목을 끌었다거나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렸던 적은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에게 화교란 가깝고도 먼 집단이고 어쩌면 내내 관심 밖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화교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 화교는 여전히 ‘변방’이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지방선거권도 보장됐지만, 국내에서 화교는 차별받는 ‘이방인’과 ‘경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주차이나는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국립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과 함께 총 10회에 걸쳐 다문화사회의 ‘거울’인 한국 화교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그들의 미래를 그려보는 기획물을 마련했다. <편집자주>
전 세계에 분포한 화교의 경제력이나 인구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하다. 정확한 통계는 알려진 바 없지만, 일설로는 세계 화교의 유동자산이 4조 달러에 육박한다고 한다.
2017년 IMF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GDP가 약 12조 달러라고 하니 그 4분의1 수준이고, 이는 한국 GDP의 2.5배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인구수도 4000만명에서 5000만명에 달한다.
물론 이 수치는 각국 정부가 자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정확한 통계를 공표하지 않고 있고, 중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확실한 수치를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추계일 뿐이다.
여하튼 그 경제력이나 인구수만 보더라도 가히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도 남을 만한 방대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화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부터 해외 중국계 언론이나 문헌을 뒤적이다 보면, ‘화교’란 말과 함께 ‘화인(華人)’이란 말이 독립적으로 혹은 병기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화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말로, 오늘날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로는 ‘당인(唐人)’이 자주 쓰이다가, 명나라 말기 이후로는 이 화인이란 말이 일반화됐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화인은 그 옛날 통용되던 화인과는 쓰임새가 사뭇 다르다. 지금의 화인은 화교와 구별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일부러 고안한 새로운 개념이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화교사무위원회는 중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화교에 대해 “국외에 교거(僑居)하고 있는 중국공민(中國公民)”이라 정의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중국의 화교정책은 이러한 기조 위에서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이후 1984년 국무원화교사무판공실은 이 정의를 다시 “국외에 정거(定居)하고 있는 중국공민이 곧 화교”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국외거주, 중국공민이란 점은 그대로 계승되는 가운데, ‘교거(임시거주)’만 ‘정거(영구정착)’로 바뀐 것이다.
동시에 국무원은 화교와 차별되는 ‘외적화인(外籍華人)’이란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왔다. 즉, “외적화인이란 중국인의 후예로서 이미 거주국의 국적에 가입했거나 혹은 그것을 취득한 자”라는 별도의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화인이란 바로 이 외적화인의 준말이다.
종합해보면 화교는 해외에 정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공민이고, 화인은 거주국 국적을 취득해 더 이상 중국의 시민이 아닌 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국적에 따라 해외동포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정부는 왜 애써 이러한 구분을 짓고자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신(新)중국 성립 이후, 아시아 신흥독립국들과의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중국의 오랜 고민이 내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해방을 통해 국민국가 형성을 서두르고 있던 다수의 동남아 국가 위정자들은 자국 내 거주하는 중국인(화교)들이 중국과 자국 공산당 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다분히 과도한 해석에 따른 것이지만, 어쨌든 화교가 중국과 이들 신흥독립국 간의 관계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이들 정부와 민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화교에 대한 그들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이익의 범위를 신속하고 명확하게 확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일환으로 중국은 1955년 인도네시아와 ‘이중국적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화교의 이중국적을 부정했다. 그동안 이른바 ‘혈통주의’ 국적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거주지에 상관없이 중국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모두 중국공민으로 간주해왔던 중국 정부가 사실상 그 모두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 혁명적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근본적 정책전환이 해외에 거주하는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와 여유를 부여했다.
현재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대략 4500만명이라고 추산할 때 이 가운데 거주국 국적을 보유한 화인은 약 4000만명이고, 화교는 나머지 500만명 정도로 본다.
다시 말해 전 세계적으로 화인 대 화교의 비율은 약 9대 1일로 화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형편이다. 점차 비율의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게 될 것이고, 이는 어쩌면 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의 화교커뮤니티는 세계 화교사회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3만명이 채 안 되는 한국의 구(舊)화교 가운데 국내 귀화를 선택해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는 극히 적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반면, 대부분의 화교들은 여전히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화교의 대부분이 중국국적을 포기한 채 거주국국적을 취득한 화인이라면, 한국 화교는 반대로 ‘중국’ 국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화교’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여타 국가의 그들보다 유달리 중국인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특별한’ 중국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른바 세계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50년대에 전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던 화교들은 조국의 분열로 인해 중국 대륙과 대만에 두 개의 ‘중국정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재규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공민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을 유지해야 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예 거주국 시민의 자격을 취득해 ‘중국인’으로서의 법적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수치로 보면, 마지막 후자를 택한 경우가 제일 많았다.
반면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아예 그러한 선택지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대한민국의 적국민이 돼 더 이상 한반도 남쪽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하자니, 부계혈통주의라는 순혈주의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대한민국 국적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전 그대로 자신들의 국적 즉,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중화민국 정부가 대륙을 떠나 타이완(대만)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냉전이 그들에게 내린 운명이었다.
한국인들 중에는 한국의 구화교를 일컬어 ‘타이완 화교’라 칭하는 이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틀린 말이라 할 수도 없겠지만,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신분과 자기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하고 분명한 교정이 필요할 듯하다.
타이완 화교는 타이완 출신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화교들 가운데 타이완을 고향으로 하고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대륙의 산둥(山東)성이 자신의 고향이다. 한국 화교를 속칭 ‘산둥 화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완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그들의 조상이 대대로 뿌리를 내린 모국도 아니었다.
적어도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으로 철수하기 전까지는 무연고지역이나 다름없던 곳이 바로 타이완이다.
그들의 중화민국 국적 유지는 고향을 등진 채 정권과 이념을 선택한 셈이다.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그들에게 고향은 언제나 중국이었고, 그 중국의 국호가 중화민국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중화민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이 아니라 현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중화민국’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구화교들은 한 번도 국적을 변경한 사실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타이완 화교가 아니다.
◆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 겸 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및 화교관행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의 마주보기’(공저), ‘그래도 살아야 했다’ 등 다수가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화교란 가깝고도 먼 집단이고 어쩌면 내내 관심 밖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화교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 화교는 여전히 ‘변방’이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지방선거권도 보장됐지만, 국내에서 화교는 차별받는 ‘이방인’과 ‘경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에 분포한 화교의 경제력이나 인구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하다. 정확한 통계는 알려진 바 없지만, 일설로는 세계 화교의 유동자산이 4조 달러에 육박한다고 한다.
2017년 IMF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GDP가 약 12조 달러라고 하니 그 4분의1 수준이고, 이는 한국 GDP의 2.5배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인구수도 4000만명에서 5000만명에 달한다.
물론 이 수치는 각국 정부가 자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정확한 통계를 공표하지 않고 있고, 중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확실한 수치를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추계일 뿐이다.
여하튼 그 경제력이나 인구수만 보더라도 가히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도 남을 만한 방대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화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부터 해외 중국계 언론이나 문헌을 뒤적이다 보면, ‘화교’란 말과 함께 ‘화인(華人)’이란 말이 독립적으로 혹은 병기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화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말로, 오늘날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로는 ‘당인(唐人)’이 자주 쓰이다가, 명나라 말기 이후로는 이 화인이란 말이 일반화됐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화인은 그 옛날 통용되던 화인과는 쓰임새가 사뭇 다르다. 지금의 화인은 화교와 구별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일부러 고안한 새로운 개념이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화교사무위원회는 중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화교에 대해 “국외에 교거(僑居)하고 있는 중국공민(中國公民)”이라 정의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중국의 화교정책은 이러한 기조 위에서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이후 1984년 국무원화교사무판공실은 이 정의를 다시 “국외에 정거(定居)하고 있는 중국공민이 곧 화교”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국외거주, 중국공민이란 점은 그대로 계승되는 가운데, ‘교거(임시거주)’만 ‘정거(영구정착)’로 바뀐 것이다.
동시에 국무원은 화교와 차별되는 ‘외적화인(外籍華人)’이란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왔다. 즉, “외적화인이란 중국인의 후예로서 이미 거주국의 국적에 가입했거나 혹은 그것을 취득한 자”라는 별도의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화인이란 바로 이 외적화인의 준말이다.
종합해보면 화교는 해외에 정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공민이고, 화인은 거주국 국적을 취득해 더 이상 중국의 시민이 아닌 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국적에 따라 해외동포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정부는 왜 애써 이러한 구분을 짓고자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신(新)중국 성립 이후, 아시아 신흥독립국들과의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중국의 오랜 고민이 내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해방을 통해 국민국가 형성을 서두르고 있던 다수의 동남아 국가 위정자들은 자국 내 거주하는 중국인(화교)들이 중국과 자국 공산당 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는 다분히 과도한 해석에 따른 것이지만, 어쨌든 화교가 중국과 이들 신흥독립국 간의 관계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이들 정부와 민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화교에 대한 그들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이익의 범위를 신속하고 명확하게 확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일환으로 중국은 1955년 인도네시아와 ‘이중국적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화교의 이중국적을 부정했다. 그동안 이른바 ‘혈통주의’ 국적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거주지에 상관없이 중국계 혈통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모두 중국공민으로 간주해왔던 중국 정부가 사실상 그 모두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 혁명적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근본적 정책전환이 해외에 거주하는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와 여유를 부여했다.
현재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대략 4500만명이라고 추산할 때 이 가운데 거주국 국적을 보유한 화인은 약 4000만명이고, 화교는 나머지 500만명 정도로 본다.
다시 말해 전 세계적으로 화인 대 화교의 비율은 약 9대 1일로 화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형편이다. 점차 비율의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게 될 것이고, 이는 어쩌면 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의 화교커뮤니티는 세계 화교사회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3만명이 채 안 되는 한국의 구(舊)화교 가운데 국내 귀화를 선택해 한국국적을 취득한 자는 극히 적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반면, 대부분의 화교들은 여전히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화교의 대부분이 중국국적을 포기한 채 거주국국적을 취득한 화인이라면, 한국 화교는 반대로 ‘중국’ 국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화교’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여타 국가의 그들보다 유달리 중국인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특별한’ 중국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른바 세계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50년대에 전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던 화교들은 조국의 분열로 인해 중국 대륙과 대만에 두 개의 ‘중국정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재규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공민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을 유지해야 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예 거주국 시민의 자격을 취득해 ‘중국인’으로서의 법적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수치로 보면, 마지막 후자를 택한 경우가 제일 많았다.
반면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에게는 아예 그러한 선택지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선택하는 순간, 그는 대한민국의 적국민이 돼 더 이상 한반도 남쪽에 거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하자니, 부계혈통주의라는 순혈주의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대한민국 국적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전 그대로 자신들의 국적 즉,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중화민국 정부가 대륙을 떠나 타이완(대만)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냉전이 그들에게 내린 운명이었다.
한국인들 중에는 한국의 구화교를 일컬어 ‘타이완 화교’라 칭하는 이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틀린 말이라 할 수도 없겠지만,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신분과 자기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하고 분명한 교정이 필요할 듯하다.
타이완 화교는 타이완 출신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화교들 가운데 타이완을 고향으로 하고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대륙의 산둥(山東)성이 자신의 고향이다. 한국 화교를 속칭 ‘산둥 화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완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그들의 조상이 대대로 뿌리를 내린 모국도 아니었다.
적어도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으로 철수하기 전까지는 무연고지역이나 다름없던 곳이 바로 타이완이다.
그들의 중화민국 국적 유지는 고향을 등진 채 정권과 이념을 선택한 셈이다.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그들에게 고향은 언제나 중국이었고, 그 중국의 국호가 중화민국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중화민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이 아니라 현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중화민국’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구화교들은 한 번도 국적을 변경한 사실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타이완 화교가 아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 겸 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및 화교관행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의 마주보기’(공저), ‘그래도 살아야 했다’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