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130년사⑥] 중화요리업의 시작과 진화

2017-10-14 18:00
  • 글자크기 설정

아주차이나-인천대 중국학술원 공동기획

화교 역사가 곧 중화요리점 역사…한국식 자장면은 해방 이후 ‘인기’

1927년 주서울 중국영사 일행이 군산중화상무회와 베이징요리 전문 중화요리점을 방문하고 찍은 기념사진.[사진=인천화교협회 제공]

강원도 춘천시 낙원동에 있는 화교 경영의 중화요리점 회영루(會英樓, 1974년 개업)에는 다른 중화요리점에서는 팔지 않는 자장면을 판매한다. ‘백년자장’(7000원)이라는 자장면의 춘장은 검은색의 일반 자장면과 달리 황색에 가까운 춘장이 특징이다.

사실 원래 춘장 색깔은 검정색이 아닌 황색이었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면 옛날식 베이징 자장면의 간판을 한 중화요리점이 많이 눈에 띈다. 이 자장면의 춘장 색깔은 황색이다. 한국의 자장면과 달리 춘장의 양이 적고 맛이 짜다. 야채와 춘장이 따로 나와 이것을 면에 넣어 비벼서 먹는다. 이것이 중국 본토의 자장면을 먹는 방식이다.

중국어로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으로 쓴다. 이것을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자장미엔’이 되고 이것을 한국에서는 ‘자장면’으로 일반적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국식 자장면이 언제 탄생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인천차이나타운의 공화춘(共和春)에서 자장면을 최초로 판매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공화춘이 인천 최초의 중화요리점이 아니다. 공화춘은 1912년경 설립됐다. 그런데 공화춘이 설립되기 이전 1906년에 인천에는 연남루(燕南樓), 동흥루(東興樓), 합흥관(合興館), 사합관(四合館), 동해루(東海樓), 흥륭관(興隆館) 등 6곳의 중화요리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공화춘이 인천 최초의 중화요리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서울에는 1889년에 이미 호떡집 복성면포방(福星麵包房)과 중화요리점이자 호텔인 이태주점(怡泰酒店)이 개업해 영업하고 있었다. 화교 중화요리점의 역사는 한국 화교의 130년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음식인 자장면은 일제강점기 때 중화요리점에서 주요한 메뉴는 아니었다. 신문에 자장면 관련 기사가 등장하는 것은 1930년대 중반이다. 자장면은 당시만 해도 무명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자장면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화교 왕송산(王松山)씨가 1948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에 ‘영화장유(永華醬油)’라는 공장을 세워 사자표 춘장을 생산했다.

이전에는 화교 가정집에서 된장 만들 듯이 춘장을 담가 저장해 두고 자장면 요리에 사용했지만, 물엿을 첨가해 단맛을 내는 사자표 춘장이 등장하면서 현재 우리가 먹는 자장면이 됐다.

중국에서 인천대학교로 유학을 온 리우웨이지에(劉威杰)씨는 한국식 자장면을 먹고 “별로 맛이 없고, 중국의 자장면이 더 입맛에 맞다”고 말했다.

대체로 중국 자장면 맛에 익숙한 중국인은 한국의 자장면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일본인 가타기리 요시오(片桐芳雄)씨는 “한국 자장면이 매우 맛있다”고 했다.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일본인은 대체로 한국의 자장면을 좋아하는 편이다.

춘천 회영루의 백년자장[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군산 빈해원의 삼선물자장[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전라도 지역에는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물자장이 있다. 2층 건물에 식당 내부가 탁 트인 중화요리점으로 유명한 군산의 빈해원(濱海園)의 인기 메뉴 ‘삼선물자장’(7000원)은 검정색의 춘장을 사용하지 않아 맑고 투명하다.

화교 중화요리점의 역사는 한국 중화요리의 역사와 겹치는 것이 많다. 1880년대 서울과 인천에서 시작된 중화요리점은 급속하게 발전한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이주해 온 화교가 주요한 고객이었지만 점차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30년 전국 중화요리점은 1635개, 호떡집은 1139개로 총 2774개였다. 이들 중화요리접에서 일하는 화교 요리사는 2349명에 달했다.

서울, 인천, 대구, 군산, 평양, 신의주와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군과 면 단위까지 중화요리점과 호떡집이 침투했다. 중일전쟁 직전에는 3000개가 훨씬 넘었다.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먼저 종업원이 20~40명 되는 ‘대형 중화요리점’이 있었는데 서울의 아서원(雅叙園), 사해루(四海樓), 금곡원(金谷園), 대관원(大觀園), 열빈루(悅賓樓), 인천의 중화루(中華樓), 동흥루(同興樓), 공화춘(共和春), 대구의 군방각(群芳閣) 등이 여기에 속했다.

이들 중화요리점은 베이징요리와 광둥요리 등 고급요리를 내는 곳으로 고급 요정 역할도 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린 곳은 아서원이고, 나석주가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식사를 한 곳은 공화춘이었다.

1940년 소파 방정환의 전집 출판기념회가 개최된 곳은 열빈루였다. 화교 중화요리점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음은 ‘중화요리음식점’이다. 종업원은 대체로 2~10명으로 ‘중화요리점’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주요 메뉴는 우동, 잡채, 양장피, 만두 종류였다.

만두는 소와 피를 빚는 과정의 차이에 따라 탕면만두, 물만두, 찐만두, 볶음만두, 냄비만두로 분류된다. 교자는 한국인이 만두라 부르는 밀가루 음식으로 찐만두에 가깝다.

세 번째는 ‘호떡집’이다. 호떡집은 주인 혼자 혹은 가족 2~3명이서 같이 장사한다. ‘호떡’하면 밀가루 피에 설탕을 넣어 구운 것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식 떡(빵)의 종류는 꽈배기, 계란빵, 참깨빵, 국화빵, 공갈빵 등 매우 다양했다.

호떡은 한국인의 기호에 맞았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신문의 연재소설에 호떡집이 등장할 정도로 일반 서민의 최고 외식이었다. 지금도 부산차이나타운에는 1951년 개업한 신발원(新發園) 등이 호떡을 판매하고 있다.

화교가 경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중국 독특의 ‘합과(合夥, 합자)’조직으로 창업했다. 자금을 제공하는 자본가인 ‘동가’와 노동력(기술)을 제공하는 ‘서가’로 나눠져 경영은 서가의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동가는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익이 발생하면 동가와 서가가 미리 정한 지분대로 이익금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부족한 자금으로 창업할 때 유리한 방식이다.

화교 중화요리집은 중화요리음식점조합을 결성해 상호 친목 도모와 과당경쟁 방지, 업계의 질서유지에 힘썼다. 1920년대 서울의 중화요리음식점조합에는 119개의 회원이 가입돼 있었다.

회원은 종로 10개, 을지로 8개, 태평로 7개, 만리동 6개, 충무로 5개, 소공동 4개로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 많이 분포했다. 1920년대 조합장은 아서원의 총지배인인 서광빈(徐廣賓)씨였다.

일제강점기 중국집의 경영주는 산둥(山東)성 푸산현(福山縣, 현재 옌타이 지역) 출신이 많았다. 서광빈씨도 푸산현 출신이었다. 푸산현은 산동요리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며 이곳 출신의 요리사가 북경의 중화요리를 주도했다.

1938년 북경의 음식점조합 임원 15명 가운데 11명이 푸산현 출신으로 북경의 식당가를 주름잡았다. 1960년대까지 한국 최고의 중화요리점으로 명성을 날린 아서원은 푸산현 출신이 아니면 주방에 들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장면과 우동 등 중화요리가 보다 우리의 생활 속에 정착한 것은 해방 이후다. 변변한 외식이 없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화요리점은 최고의 외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화교 경영 중화요리점은 1960년대 말 전국에 약 400개에 달해 화교의 70%가 이 직종에 종사했다.

그러다 당국의 중국집에 대한 각종 규제 및 차별적 조치와 화교의 해외이주로 인한 인력 부족이 겹쳐 1970년대 들어 문을 닫는 중화요리점이 늘었다.

화교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중화요리 기술을 한국인이 습득해 중화요리점을 잇따라 창업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인 자본가가 화교 요리사를 고용해 대형 중화요리점을 잇따라 개설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던 서울의 아서원, 대관원, 열빈루, 복해헌(福海軒)과 인천의 공화춘, 대구의 군방각이 문을 닫은 것은 1970년을 전후였다. 현재 전국의 화교 경영 중화요리점은 1000~2000개로 추정된다. 가장 많을 때의 약 4분1 수준이다.

하지만 1970년대 해외로 이주한 화교는 이주지에서 한국식 중화요리의 전도사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중화요리점을 경영하던 한중정(韓中正·73)씨는 미국으로 이주, 중화요리점 ‘Feng Mei’를 개업해 큰 성공을 거뒀다. 지금은 그의 장남이 경영을 이어 받았다.

대만에도 한국화교가 경영하는 중화요리점이 적지 않고, 최근에는 중국 대륙에도 진출해 한국식 자장면을 팔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한국화교의 중화요리점이 있다고 하니 한국식 중화요리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동양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화상연구중심의 특별초빙연구원(교수)으로 재직 중이다. 화교사 및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일본어, 단저)와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공저) 등 다수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