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달빛정책’ 성공하려면 탈(脫)원전 재고해야

2017-07-24 20:00
  • 글자크기 설정
 

[사진=이재호]

‘달빛정책’ 성공하려면 탈(脫)원전 재고해야

탈(脫)원전 논의가 환경과 안전, 비용 차원에서만 진행되는 듯해 아쉽다. 한번쯤은 남북관계라는 큰 틀 속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북한의 전력난은 심각하다. 북에 간 우리 대표단이 전깃불이 안 들어와 촛불을 켜놓고 회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겨울철엔 숙소에서 온수가 안 나와 애를 먹곤 한다. 북이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뒤진 건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으로 국가발전이 정체된 탓이다. 이를 일거에 만회할 수단으로 선택한 게 핵이고.


에너지 지원은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 중의 하나였다. 북에 필요한 걸 주면 굳이 핵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터. 이런 생각은 1994년 10월 북·미(北·美)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구체화됐다. 40억 달러를 들여 100MW 용량의 경수로 2기를 북에 지어주기로 하고 북은 그 대가로 핵개발을 포기토록 한 것. 합의는 이행과정에서 깨져버렸지만 남북관계에서 에너지가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에너지가 다시 등장한 건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베이징)에서였다. 회담대표들은 북핵 포기의 대가(代價)로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약속하면서 북한에 200만kW의 전력도 주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9·19선언인데, 에너지가 북의 비핵화를 이끌어낼 가장 효과적인 현물(現物)임을 확인한 것. 진보진영은 지금도 9·19선언을 북핵문제 해결의 정석으로 여긴다. 이 선언대로만 했다면 북핵 위기는 해소됐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정인 청와대특보(외교안보통일)가 언급한 ‘북의 핵·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연합훈련 축소’ 방안도 그 뿌리는 여기에 닿아 있다. 그처럼 중요한 선언의 물적(物的) 기반이 결국 전력인 셈이다.

탈원전으로 우리의 에너지 역량이 위축된다면 북핵을 저지할 중요한 수단 하나를 잃을 수도 있다. 전기를 주고 싶어도 없어서 못 주는 상황이 온다면, 남북관계 개선이나 북핵 해결에 득보다는 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핵에는 핵으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북한이 우리에게 의존할 게 많도록 만드는 것이 현책이다.

북한의 총 발전설비 용량은 2014년 기준 725만3000kW로 우리 용량(8697만kW)의 7.8%에 불과하다(에너지일보 2016년 4월 7일). 북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 전인 1989년 수준(292억kWh)으로 회복하려면 발전량이 77억kWh로 늘어나고, 135만kW의 신규 발전설비도 갖춰야 한다. 탈원전 이후에도 우리가 북측의 이런 수요를 무리 없이 충당할 수 있을까. 통일이라도 되면 전기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북한 주민의 1인당 소득을 3000달러로 늘리려면 264만kW, 1만 달러로 늘리려면 1232만kW의 신규 발전설비가 필요할 거라고 한다(홍순직 현대경제연구원, 통일경제 2015. 제1호).

미국의 마커스 놀란드(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경제적 관점에서 점진적인 통일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해온 대표적 학자다. 북한이 지금처럼 낙후된 상태에서 통일을 하게 되면 남한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북한을 꾸준히 지원해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든 뒤에 통일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 그는 2012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통일과 한국경제 국제콘퍼런스’에 참석해 “남북 간 경제적 격차는 과거 동서독보다 크고, 북의 경제구조는 동독에 비해 훨씬 왜곡돼 있으며, 남한은 구(舊)서독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고, 북한주민들은 동독주민들보다 훨씬 고립돼 있다”고 지적했다(세계경제연구원 2012년 10월 19일). 한마디로 통일비용이 예상보다 더 들 것이라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역대 정권 하에서의 남북합의도 부담을 가중시킬 게 분명하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선언만 해도 그렇다. 이 선언은 북한에 너무 많은 걸 약속하고 있다. 서해평화협력지대 건설 및 공동어로구역 설정, 개성공단 2단계 건설, 해주 특구와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조성, 백두산 직항로 관광 등, 주요 사업만 3개 분야 48개에 달한다. 이를 다 이행하려면 총 116조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런 사업들이 차질 없이 진행되려면 역시 에너지가 확보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에너지가 뒤받쳐주지 않는다면 허울에 그친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1단계 개성공단 운용에 들어간 전기도 모두 남측에서 보냈다. 남북 교류·협력사업에 관한 한 북한은 으레 운용전력까지 요구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200만kW의 전기를 보내준다고 하면, 낡아서 누전 손실률이 최고 50%에 달하는 북한지역의 송배전망까지 개보수해줄 걸로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력이 빠진 채 기존의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만으로 남북한의 전력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까. 아니, 문 대통령이 신(新)베를린구상을 통해 밝힌 대로 한반도에 새로운 경제지도를 그리려면 전력(에너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닐까. 혹여 탈원전이라는 진보적 가치가 전력 부족으로 대북 포용이라는 또 다른 진보적 가치(달빛정책)에 장애가 되는 모순이 생기지는 않을까. 탈원전에 앞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먼저 듣고 싶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