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대선에 이어 또 담뱃값 인하를 들고 나왔다. 지난 20일 자유한국당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에서다. 그는 “주사파 운동권인 문재인 정부에 맞서 유류세와 담뱃세 인하를 내걸고 총력 투쟁하면 서민들이 우리 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담뱃값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혹여 흡연에 의존하려는 건 아닐까. 흡연(吸煙)이 아닌 흡연(吸緣) 말이다.
한국에는 혈연·지연·학연 외에 흡연이란 연(緣)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과 이들이 금연사회에서 느끼는 소외감을-바꿔 말하면 유대감을-풍자한 우스갯소리다. 예컨대 한 직장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 흡연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래도 관계가 끈끈할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직장상사라면 내 인사고과에 유리할 수도 있다. 흡연이 흡연(吸緣)이 되는 순간이다.
홍 전 지사를 비롯한 보수세력이 보수의 부활을 꿈꾼다면 이쯤에서 사회자본(social capital)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게 본질에 다가간다. 사회자본은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쉬운 개념이나 이론은 아니다. 그냥 편하게 말한다면 경제가 돌아가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듯이 사회도 돌아가려면 자본이 필요하다는 주장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자본인가. 신뢰, 참여, 네트워크, 지속성, 안정성 등이다.
사회자본은 1990년대 공산권 국가들이 자유화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정치체제가 바뀌었다고 저절로 시민사회(civic society)가 되는 건 아니고 상응하는 사회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자각이 확산됐던 것. 이런 인식은 선진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버드대의 로버트 퍼트넘 교수(76·정치학)는 갈수록 개인화(파편화)되는 사회가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신뢰, 규범, 네트워크 등을 사회자본으로 봤다. 그는 ‘혼자서 볼링하기-미국사회의 붕괴와 재생’(2000년)이란 저서에서 미국사회의 사회자본 쇠퇴를 우려하기도 했다(앤드루 헤이우드, ‘정치학’ 2013년).
사회자본은 가치중립적 용어처럼 들리지만 주로 보수와 연관돼 있다. 보수는 전통의 형태로 축적된 가치나 미덕을 사회자본으로 본다. 그들에겐 전통 자체가 사회적 결속과 정치적 안정을 강화시켜주는 주요한 사회자본이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개척자 정신’이란 기치 아래 주창했던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근면, 자조(自助), 모험심도 그중 하나다(물론 좌파는 전통엔 한 사회에 특정 질서를 강요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사회엔 어떤 사회자본이 요구될까. 적어도 보수의 입장에선 신뢰, 규범, 전통, 참여, 자기책임성, 자조, 근면 등이 될 것이다. 언필칭 보수정당이라면 이런 자본을 축적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의 정체성(正體性)은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나온다. 한 예로 보수가 가장 취약한 사회자본이 있다면 ‘참여’다. 참여에 있어선 늘 진보에 뒤진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참여란 대체로 불온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돼온 탓이 크다. 참여란 원래 시민문화(civic culture)의 형성기에 보수가 강점을 가진 사회자본이었는데 진보에 뺏겼다. 디지털 시대에 보수의 인식 부족과 게으름 탓이 크다.
최근 보수언론의 한 원로논객은 “(대선 이후) 정치적으로 보수는 궤멸하고 있다”면서 “보수의 이념을 체계화하고 좌파의 정책을 하나씩 격파해나갈 머리 좋은 지도자를 찾으라”고 조언했다(김대중, 조선일보 6월 20일자). 공감하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보수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찾고, 그를 통해 사회자본을 키워가는 게 효과적인 대응인 건 맞는다. 허나 그런 인물이 있을까 싶다. 보수를 살아 숨쉬게 할 사회자본의 축적이 없이는 무망한 일이다.
서구에선 근면, 자기책임, 충성, 가족, 교육과 같은 사회자본은 전통적으로 보수의 것이었다. 한국 보수의 출구도 이 언저리에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보수라면 궤멸을 걱정할 게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현실을 고민해야 한다. 흡연(吸緣) 따위에 기댈 일은 아니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학자 마이클 오크쇼트(1901-1990)는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건 “알려지지 않은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믿을 수 없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것을, 신비로운 것보다는 팩트를, 가능한 것보다는 실제적인 것을, 무제한적인 것보다는 제한적인 것을, 완벽한 것보다는 편리한 것을, 유토피아적 천국보다는 오늘의 웃음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좌절하고 지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위로와 희망, 그리고 참고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