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 중 ‘압권’은 여당인 민주당의 논평이었다. 백혜련 대변인은 1일 “기대이상의 성공적인 회담이었다”면서 “6개월 이상의 외교 공백을 단기간에 극복하고 전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평했다. 또 “대북문제에 대해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을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에서는 더 이상 굴욕외교는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여당임을 감안해도 조금 과한 감이 있다.
정작 두 정상의 공동성명엔 이렇게 해석될 만한 부분이 없다. ‘대북문제의 주도권’은 아마도 중간에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환경조성에 있어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the ROK’leading role)을 지지했다”는 대목에서 유추한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과거에도 한반도문제가 거론될 때면 거의 의례적으로 삽입됐던 문구다. 중국이 입에 달고 사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과 같은 수준의 레토릭이다. 여당의 이런 호들갑이 오히려 이번 회담의 의의를 반감시킬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제재와 대화를 활용한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북핵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트럼프 대통령과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공동성명에 나오는 “북에 대화의 문은 열려 있고,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도록 기존의 제재를 이행하고 최대한 압력을 가하겠다”는 대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짜놓은 정교한 프레임에 안착한 느낌도 준다. 사드(THAAD)만 해도 민감한 현안이라 거론을 안 했다지만 거론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두 정상이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대북 확장억지(extended deterrence)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조건부 전시작전권 조기 전환, 한·미연합방위능력의 강화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드 배치를 안 하거나 늦추기로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공동성명은 한국이 연합방위를 주도하기 위해 ‘결정적인 군사적 능력들을 계속 획득하는 것’으로 돼 있다(The ROK will continue to acquire critical military capabilities to lead combined defense···).
동북아의 안정과 북한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한·미·일 3국 간 협력(trilateral cooperation)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눈길을 끈다. 대(對)중국 견제를 위한 공동전선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경고로 읽힌다. 2015년 9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으로 “중국에 경도됐다”는 얘기를 들었던 우리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애초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했던 대로 재협상의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다고 이번 회담의 의의를 가볍게 볼 건 아니다. 두 정상이 서로를 알게 됐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 들어서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성과가 작지 않기 때문이다. “당선되면 평양에 먼저 가겠다”고 했고, “동맹이라고 해도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한국의 새 지도자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이 많이 가셨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 자체가 귀중한 소득이다.
미국 측의 평가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회담이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재난’이 아니었다”는 한 전문가의 말은 많은 걸 시사한다. 문 대통령이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의 의의를 평가하고, 흥남철수에 얽힌 자신의 가족사로 워싱턴을 감동케 한 것도 한몫했다. 돋보인 대응이었다. 역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진정성이 담긴 스토리다. 문 대통령 자신도 회담 후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기대 밖으로 환대를 받았고, 기대 밖으로 성과가 있었다”며 만족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내비쳤다.
물론 앞으로 정상회담에서의 합의를 구체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을 개연성이 높긴 하다. 특히 핵심 쟁점인 북의 비핵화를 위한 ‘대화의 조건’을 놓고 양측이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다. 미국 재무부가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의 방미 때 대북 제재의 일환으로 중국의 단둥은행을 돈세탁 우려기관으로 지정해 전격 발표한 것은 그 서막처럼 느껴진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힘의 과시라고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한국의 새 정권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회담 결과를 놓고 언필칭 진보와 보수 측의 평가가 다른 듯하다. 진보 일각에선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더 강하게 미국을 압박해 남북대화의 재개는 물론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관광 재개까지도 당장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못했다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문 대통령이 현실주의자들-그들의 눈에는 한·미관계의 수혜자들-이 쳐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개탄할 수도 있다.
국가관계가 늘 그렇듯이 우선 정상 간에 인간적인 관계가 좋아야 한다. 진보가 남북관계의 이정표로 여기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DJ)과 클린턴 대통령 사이에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사람은 서로 믿고 좋아했다. DJ에 대한 클린턴의 존경심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국제정치에서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와의 대논쟁(제1차 논쟁)을 여기서 되풀이하는 건 지루한 일이다. 그럼에도 전후(戰後) 70여년간 인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긴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현실주의자들(realists) 덕분이었다. 이념보다는 국가이익을, 명분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는 그들 때문에 3차 세계대전 같은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가까이로는 지난달 87세로 타계한 ‘독일 통일의 아버지’ 헬무트 콜을 비롯해 외교적으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룬 지도자들은 대부분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한국에서의 친미(親美)는 1980년대의 반미(反美)를 거쳐 용미(用美)로 정착됐다. 현실주의적으로 진화한 셈이다. 그런데도 80년대 운동권의 눈으로 오늘의 한·미관계를 보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개인적 좌절의 해소(출구)를 반미운동에서 찾는 사람들이나, ‘분단체제’라는 도식적 틀에 갇혀 한반도를 보는 사람들의 눈과 머리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강고한 동북아의 현상유지체제(status quo)를 바꿀 힘도, 지혜도, 용기도 없으면서 매사를 부정하고 실현가능성도 없는 어젠다를 들고 나와 오직 세상의 이목을 구하려 든다.
문 대통령이 이들과 거리를 뒀으면 한다. 누가 뭐래도 한·미동맹이 우리의 안보와 생존의 한 축이다. 이번 정상회담이 문 대통령에게 이런 현실인식을 새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미관계는 현실의 나무가 자라는 토양이다. 모든 건 그 땅 위에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