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지락필락(​智樂弼樂)] ‘기자에몬이도’와 알폰스 무하

2017-06-25 20:00
  • 글자크기 설정

[사진=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6월 초순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주된 목적은 한 가지, 우에노 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차노유(茶の湯)’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차노유’는 손님을 초대하여 차를 끓여 권하는 예의범절(茶道)이나 차를 끓여 마시는 모임(茶会)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도(茶道)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차노유’ 전시회는 차와 관련된 찻사발(茶碗) 등의 차제구(茶諸具), 서화(書畫) 중에서 엄선한 작품만 보여준다.
뭐 엄청난 거라고 도쿄까지 가서 보고 오나, 라고 말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도자기 관련 책을 이미 네 권이나 낸 필자로선 상황이 좀 다르다. 게다가 이번 전시회 품목 중에는 평소 보기 힘든 일본 국보 두 점이 포함돼 있다.
이번에 바깥 공기를 쐰 일본 국보 찻사발에는 저 유명한 ‘기자에몬이도차완(喜左衛門井戶茶碗)’이 있다. 조선 땅에서 만들어진 찻사발로, 차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길 희망하는 명물이다. 평소에는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분원인 고호안(孤蓬庵) 깊숙이 몸을 감추었다가 이런 큰 전시회 때나 아주 가끔 선을 보이는 ‘귀하신 몸’이다. 이 명물은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그 이후도 접견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또 하나의 국보는 시노다완(志野茶碗)인 ‘우노하나가키(卯花墻)’다. 평소 미쓰이기념미술관(三井記念美術館)에 소장돼 있는데, 이번에 역시 선을 보였다. 일본 국내에서 만들어진 찻사발로 2개밖에 없는 국보 중 하나다. 미노(美濃) 무타보라가마(牟田洞窯)에서 구워진 것으로 1959년에 국보로 지정됐다. 비뚤어진 몸체, 자유분방한 주걱 놀림에 의한 절삭과 문양 등 오리베(織部) 취향의 작품이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 사범으로 일본 ‘와비차(侘び茶)’를 완성했으며,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사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센리큐(千利休)가 사용했던 이런저런 물품까지 선보이는데 6월 4일 전시가 끝난다고 하니 비행기 티켓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각설하고, 4월 11일 시작한 이 전시회는 5월 26일, 46일 만에 20만명의 관람객이 들었다. 이후 폐막까지 얼마나 더 들었는지는 보도가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끝날 무렵에 관람객이 더 몰리는 특성을 고려하면 대략 25만명 정도는 봤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관심을 끈 또 하나의 전시는 롯폰기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린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전’이었다. 도쿄에 간 김에 이곳에도 들른 필자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인산인해, 입장을 위해 길게 늘어선 관람객 줄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줄 서서 기다리느라 기진맥진하는, 악명 높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3월 8일에 시작해 6월 5일에 끝난 ‘알폰스 무하전’의 관람객은 6월 2일에 60만명을 넘어섰다. 대략 석 달 만의 기록이다. 2400엔짜리 카탈로그 판매도 이날 11만5000부를 돌파했다. 알폰스 무하전은 최근 우리나라 예술의전당에서도 열렸고, 그가 일본인에게 인기가 많나 보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알폰스 무하가 일생을 바친 ‘장엄한 시간여행’ <슬라브 서사시> 전 20작이 프라하 바깥에서는 세계 최초로 공개되었다.
<슬라브 서사시>의 스펙터클은 고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훑는 초대작이다. 그런 대작을 일본국립미술관이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려는 관람객이 그렇게 줄을 섰다. 진정 ‘소프트 파워’의 위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중앙국립박물관의 특별전 가운데 관람객이 가장 많았던 것은 2014년 오르세미술관전(5월 3일~8월 31일)으로 37만8000여명이 들었다고 한다. 도쿄 국립박물관의 경우 1974년 ‘모나리자전’의 150만명이다. ‘모나리자’ 단 한 작품만 걸어놓았던 전시회였다. 1965년 도쿄와 교토, 후쿠오카 세 곳에서 이어가며 전시한 ‘투탕카멘전’이 총 관람자 수 295만명으로 일본 기록 1위다. 2위는 2012년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최한 ‘투탕카멘전 : 황금의 비보와 소년 왕의 진실’로 총 208만명이다.
긴 얘기 할 필요도 없이 박물관과 미술관 관람객 숫자는 그 나라 문화 수준, 경쟁력과 정비례한다. 관람객과 소비자가 없는데 예술문화 수준이 올라갈 리 없고, 독자가 없는데 질 높은 출판저작물이 나올 리 없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우리나라 관람객이 많으니, 미국과 동시 개봉하거나 서울에서 아시아 최초로 개봉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서울로 직접 오는 대형 스타들도 부쩍 많아졌다. 관람객이 많으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 비행기 타고 파리나 프라하에 가지 않아도, 모나리자도 오고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도 온다.
제발 박물관과 미술관에 많이 좀 가자. 1년에 한 번도 미술관 가지 않으면서, 한 권의 책도 사지 않으면서 우리나라 수준이 어쩌네 저쩌네 하고 떠들지 말자. 극장 가는 시간의 4분의1만큼이라도 투자를 하자. <슬라브 서사시>와 기자에몬이도를 서울에서 편하게 좀 보고 싶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