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 문화칼럼-智樂弼樂 2] 이한열과 이애주, 그리고 30년

2017-06-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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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樂弼樂 2. 이한열과 이애주, 그리고 30년
조용준(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사진=조용준]


나는 소위 80학번이다. 80년의 봄, 그 때 새내기 1학년이었다. 대학생으로서 새 학기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화문에서 기습적으로 열린 시국 관련 첫 야간데모 때 벌벌 떨면서 참가했다. 무자비한 백골단에 붙잡히기만 하면 ‘골로 가던’ 시절이었다.
5월 15일 대대적인 서울역 집회 현장에도 있었다. 학교에서 서울역까지 “전두환 퇴진” “계엄 철폐”를 외치며 걸어갔다. 그러나 이 날 시위는‘서울역 회군(回軍)’이라는, 통한의 치욕스런 이름이 붙은 채 막을 내렸다. 이틀 후 17일 자정을 기해 신군부는 계엄령을 확대하고 공수부대를 주요 도시에 투입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광주에서 민주화항쟁이 시작되던 18일 아침 나는 학교 정문 앞에서 탱크를 봐야 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살벌한 공수부대원은 학교 진입을 가로막았다.
낭만으로 가득 찼어야 할 대학 새내기 시절은 이렇게 잔혹한 시간으로 흘러갔다. 박정희를 이은 전두환의 쿠데타와 군부 독재에서 나는 대학생활을 마쳤고 사회에 나와 기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 1987년이 되었다.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민주시민항쟁이 다시 촉발되었다. 6월 항쟁을 성난 파도로 만든 것은 6월 9일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었다.
7월 5일 결국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9일에 열렸다. 연세대 정문 앞에 수십만 명이 운집했다. 운구 행렬 앞에는 흰 치마저고리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작은 체구의 여성이 섰다. 승무 인간문화재인 이애주 당시 서울대 교수였다. 그는 풍물패 장단을 따라 이한열의 넋을 달래는 춤을 추었다. 멍석에 둘둘 말렸다가 이를 벌떡 풀어헤치고 일어났고, 삼베 천을 둘로 가르며 두 팔을 뻗고 나아갔다. 이름하여 ‘바람맞이 춤’, 바람을 맞아 생명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은 춤이었다.
6월 항쟁을 기자로 참여했던 나는 이날 ‘이애주 담당’이었다. 이애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면서 운구행렬을 따라갔다. 울면서 그의 춤을 따라갔다. 그는 불볕더위에 탈진이 되어 쓰러졌다가도 벌떡 일어나 다시 춤을 이어갔다. 그의 춤은 연세대 정문에서 시작해 신촌로터리, 아현동 고가도로를 지나 시청 앞 노제(路祭)까지 길게 이어졌다. 평생 못 잊을 ‘롱테이크(long-take)’다.
그로부터 30년이 다시 흘렀다. 30주기 추모제에서 이애주는 다시 춤을 추었다. 이애주의 이번 춤은 아마도 씨앗이 물을 만나 싹을 틔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 새 생명을 잉태할 바람을 불렀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해본다. 이애주가 30년 전 추던 ‘시국춤’을 따라가며,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화와 정의를 구현해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늘을 향해 곡사(曲射)로 쏘는 것이 원칙인 최루탄을 직사로 쏘아 사람을 맞추어 죽이고, 물고문으로 생때같은 청년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을까? 돈과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럽다가도 서민들에게만은 가혹하기 그지없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행정질서와 법 집행의 행태가 바뀔 수 있을까? 노동자를 착취해 자본가의 배만 부르게 만드는 온갖 경제정책과 병폐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그런데 30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여전히 똑같은 의문을 가진다. 곡사가 원칙인 물대포를 직사로 쏘아 노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정보기관과 군인이 불법 선거운동을 일삼아도 처벌 받지 않으며,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할 국민연금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사용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인과 문화인을 감시·통제하고, 돈과 권력의 힘으로 대학까지 마음대로 집어넣으며, 7천원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의 1만원 인상안에 결사반대하여 “돈 많은 부모를 두는 것도 실력”이라는 ‘개뼉다구 망발’이 마치 어쩔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청소년들의 가슴에 피멍 들게 만드는 현실이다.
30년 전과 뭐가 다를까? 뭐가 다른가?
군부독재의 울타리 안에서 혜택과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이 사회의 주류 ‘앙시엥레짐’은 오히려 진화했다. 그들의 술수는 더욱 교묘해지고, 더욱 지능화됐으며, 더욱 간교해졌다. 그들만의 리그인 네트워크 역시 더욱 공고해지면서 감추어지고 있다. 30년 전에도 시청 앞에서 노제를 벌일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우리 사회의 공기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억압과 구속, 비열한 음모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일까?
30년이 지났지만 6월 항쟁, 11월 촛불혁명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진행 중이다. ‘헬조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애주의 시국춤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이 땅에서 그런 춤이 추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런 무거운 글도 쓰고 싶지 않다. 그저 맘 편하게 싸이의 ‘강남 스타일’과 ‘챔피온’이나 부르면서 춤추고 싶다. 세상 걱정일랑 정의감 넘치고 국민 떠받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하루 빨리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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