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유럽 통상사절단(通商使節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그동안 고대생들의 한·미 행정협정(韓·美 行政協定) 촉구 데모가 있었음을 알았다.
4·19 이후 학생들은 자신감에 넘쳐 격렬한 사회참여(社會參與) 의욕을 나타냄으로써 중대한 정치문제가 터질 때마다 자기들의 힘으로 이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은 자유세계의 보루로 자처하여 갖가지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국방비 관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과 미국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양국은 그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국은 대등한 입장에서의 상호 협조와 이해가 요청되는 터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요청은 이론상의 문제에 불과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한국인은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한·미행협(韓·美行協) 체결 문제는 그런 관련에서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에서는 이의 체결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주한미군(駐韓美軍)들의 한국인에 대한 행패가 도를 넘어도 한국인은 호소할 데가 없어 미군들의 린치 사건 같은 것이 발생할 때마다 한국인들은 양국간의 행정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고대 학생들은 양주와 파주의 사건 발생을 계기로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침 현충일(顯忠日)이었다. 총장 유진오(兪鎭午)는 학생들의 의식이 끝나는 대로 데모에 나설 계획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식사(式辭)를 끝내자 곧 학생들에게 자중을 호소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형(國家型)의 행정협정이 소망스럽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형태의 협정 체결 가능성이 없는 터에 학생들이 데모를 벌인다는 것은 정치적 혼란만 심화시키고 잘못하면 맹방(盟邦)과의 우의(友誼)를 손상할 뿐이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벌써 학생들이 데모 결의(決議)를 끝낸 뒤였다. 데모대(隊)의 목표는 미 대사관(美 大使館)이었다. 1대는 분산하여 미 대사관 부근에 가 있고, 주력시위대(主力示威隊)는 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주력시위대의 시내로의 전진은 쉽지 않았다. 수백 명의 경찰이 안암동 로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모대는 경찰에 의해 완전히 제지되었고, 그러자 학생들은 그곳에 연좌(連坐)하였다. 마이크가 가설되고 선언문(宣言文)이 낭독되고 행동강령이 천명되었다. 대정부건의안(對政府建議案)과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도 채택되고.
그 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해산했지만 학생들의 일부는 미 대사관 부근으로 산발적으로 모여들었고,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과 합세하여 미 대사관 앞에서의 연좌 데모 강행을 결의했다. 미 대사관과 공보관은 굳게 철문이 닫히고 거리는 한산해졌다. 그러나 그곳에도 경찰대는 집결되어 학생들은 모조리 연행되었다. 스크램을 짜고 반항한 학생도 있었으나 허사였다. 물론 연행된 학생들은 그 뒤 모두 풀려나 학교로 돌아왔다.
목당은 고대 학생들의 데모 소식을 들으며 학생들의 데모 풍조는 앞으로도 가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모에 나서는 학생들의 동기는 언제나 순수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순수하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을 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데모가 그들의 의사(意思)를 표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들의 의사가 현실정치(現實政治) 위에 실현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목당은 영국 사람들의 데모를 많이 보아 왔다. 그들은 목적의식(目的意識)이 확실했다. 학생 데모의 한계성(限界性)을 학생들 스스로 자각하는 날이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을 목당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