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군사정권이 들어서 보세가공(保稅加工) 수출에 대한 관심을 보여 1961년 12월 관민합동조사단(官民合同調査團)을 국외로 파견한 바 있었는데, 1962년에 들어와서는 자유무역에 대한 신념이 굳어지자 적극적인 시장개척에 의욕을 보이게 되었다. 1962년 한 해 동안 정부는 유럽 지역 통상사절단(通商使節團) 파견, 미국 및 캐나다 지역 민간무역사절단(民間貿易使節團) 파견, 아프리카 지역 통상사절단 파견 등 3개 지역에 걸친 통상사절단 파견이 있었다. 한국 무역의 새 장을 여는 활동이 전개된 것이다.
유럽 지역 통상사절단은 정부가 주동이 되었던 것으로, 당시의 최고위원 김형욱(金炯旭) 등이 참여했는데,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단장이 되어 유럽 9개국을 돌았다.
엽서에 보면, 5월 26일 파리에서 ‘작일(昨日) 오전(午前) 파리(巴利)에 무사히 도착하였소’라고 서두에 적고 있으니 파리에 닿은 것은 25일이었으며, 여기서 목당은 뜻밖에 동생 호(湖)와 상봉하였다. 호는 석 달 전 미 국무성 초청 ‘리더스 그랜트’ 계획에 따라 함석헌(咸錫憲)과 같이 미국으로 갔었는데 3개월 스케줄을 끝내고 유럽 여행길에 파리에 도착하였다가 대사관을 통해 목당이 파리에 온 것을 알고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목당 일행은 당초 파리에서 대엿새 머물 예정이었으나 29일 파리를 출발, 벨기에로 향했다. 비행장엔 호도 나와 전송해 주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파리에서 두 형제는 시간이 나는 대로 행동을 같이 했다. 목당이 즐겨하던 치즈를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같이 가기도 했고 파리 교외의 관광지 퐁텐블루를 찾기도 했다.
벨기에로 떠나기 앞서 통상사절단은 프랑스의 유력자들을 초대하여 만찬연(晩餐宴)을 가졌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예정을 앞당겨 다음 방문지로 떠나게 된 것인데, 호는 2, 3일 파리에 더 머물다가 로마로 떠난다고 했다.
6월 14일의 편지는 스톡홀름에서 쓴 것으로 벨기에를 거쳐 덴마크에 들렀다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도착, 호텔 브롬마(Bromma)에 여장을 풀면서 띄운 듯 했다.
‘이곳도 내가 정말(丁抹, 덴마크)에 유(留)할 때 종종 방문한 곳이라 그런지 생소한 곳은 아니나 많이 변한 것 같소. 이 호텔은 아주 최신식으로 제선(諸船)이 매우 훌륭하오·····.’
하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목당은 런던대학 유할 때 덴마크에 여행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며 이때 가끔 스톡홀름도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행은 스톡홀름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에서 그곳 유력한 상공업자들과 무역회의를 가져 장시간 협의한 다음 그들의 초대로 화려한 호텔에서 대접을 받는 등 환대(歡待)를 받았다. 목당은 스웨덴이 북구(北歐)에서 가장 잘살고 고도의 문명을 가진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 단원들은 그곳 상인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가졌는데, 덴마크보다는 수확이 컸다. 일행은 15일까지 체류한 다음, 다음 방문지인 네덜란드로 떠났다.
6월 17일 오후 9시경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일행은 도착하였다.
‘···이곳 상공회의소와 외무성(外務省) 주최의 오찬회(午餐會)에 초대를 받았소. 이곳 유력한 무역업자와 회담(會談)을 한 결과 상당한 교섭이 되는 것 같소. 이 도시(都市)도 구주(歐洲)에서 상업(商業)으로 유명한 곳이오···’
이곳에선 비행기 제작소와 필립스의 텔레비전 세트 공장 등을 목당 일행은 시찰했다.
6월 14일, 라인강 선상(船上)에서
‘···라인(Reine)을 8시간(時間) 가까이 선부(船艀)하였소. 독일(獨逸)의 대동맥(大動脈)이 분명하오. 무엇보다 강변(江邊)에 울창한 수목(樹木)과 광대(廣大)한 포도원(葡萄園)이요. 자고(自古)로 유명할 뿐 아니라 처(處)에 공업(工業)이 발전된 것이 더욱 광장(宏壯)하오. 한강(漢江)을 이 강과 같이 만들 수 없을까 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묵상(黙想)케 하오. 이곳 토산(土産) 포도주(葡萄酒)를 일배(一杯) 하고 왔소.’
목당은 스위스로 가는 길에 로마에 기착하여 다시 엽서를 띄우고 있는데 이 편지 사연에서는 꽉 짜인 스케줄로 강행군을 하다 보니 대단히 피로한데다가 수면 부족으로 더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약 30, 40분 휴식(休息) 후 목적지 서서(瑞西, 스위스)로 향할 예정이오. 이곳은 그리 덥지 아니하여 매우 기분이 상쾌하오. 이곳도 20년 전에 잠깐 방문한 곳이 되어 그리 낯이 설지 아니하오.···’
일행은 서독에서 스위스를 들러 영국으로 들어간 모양이어서 스위스에서 띄운 편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영국 런던의 유명한 리젠트 가(街)에 있는 피카디리 호텔에서 목당이 쓰고 있는 편지가 남아 있다.
‘···어쩐지 나는 윤돈(倫敦, 런던)이 좋아요, 이 호텔은 런던에서 제일 유명한 곳의 하나요. 예전 내가 유학(留學) 당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이곳 여행(旅行)을 와서 있을 때에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와 나를 데불고 만찬(晩餐)을 바로 이 호텔 식당(食堂)에서 2, 3차 같이 한 것이 문득 연상(連想)되오. 그때 양주(洋酒)와 비싼 캐비어를 먹으면서 담소낙낙(談笑樂樂)하던 것이 꼭 어제일 같소···.’
목당이 런던 대학 유학을 마치고 런던을 뜬 것이 1937년이었으니 25년 만에 대하는 런던이 감격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목당은 그동안 거쳐 온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에서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다. 인심도, 언어도, 식사나 교통도 불편하여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인데, 런던에 들어서자 옛집을 찾아온 것 같은 분위기에 잠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29세에 런던에 유학하여 39세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청춘기(靑春期) 10년을 런던에서 보낸 셈이다. 그는 일본에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 정경과(政經科)에 적을 두면서 정규(正規) 영어학교(英語學校)를 다니며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유학을 생각하고 배우는 영어 공부였기 때문에 그는 남달리 열심이었고 영국으로 떠날 땐 어느 정도 영어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런던 대학에 적을 올리고 강의실에 들어가자 제대로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
목당은 공원 풀밭에 누워 외딴 나라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떼를 써서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온 유학길이었는데 원점으로 되돌아가 영어를 다시 공부해야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교수를 통해 다시 영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뒷날 그가 주옥 같은 영어 문장을 구사하고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당시의 이러한 피나는 어학수학(語學修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무협(貿協)의 정관(定款)을 유려한 문장으로 처음 영역(英譯)해 낸 것도 바로 목당이었던 것이다.
인촌이 영국으로 와 있을 때만 해도 어찌나 공부에 쫓겼던지 목당과 설산은 인촌이 통화에 불편을 느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목당의 영국 생활 10년은 이렇게 각고(刻苦)의 세월이었는데 그런 그가 실로 25년 만인 64세의 노경(老境)에 이르러 런던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 목당은 런던대학을 찾아 강의실을 찾고, 학생회관에 일행을 끌고 가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으며, 러셀 스퀘어공원 벤치에서 회상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하숙집을 찾았지만 마담 부영은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주인은 바뀌었으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역시 런던대학생 상대의 하숙을 치고는 있었다. 마담 부영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었다.
‘···재작야(再昨夜) 12시경(時頃) 로마(Roma)에서 초대연(招待宴)을 필(畢)하고 와야행침태차(臥夜行寢台車)로 작조(昨朝) 8시에 이곳에 도착하였소. 그 후 이 곳 유명한 공장을 시찰하였소. 이곳도 공업도시(工業都市)로서 이태리(伊太利)에서 제일일 뿐 아니라 구주에서도 굴지인 곳이오. 금일(今日) 상공회의소에서 통상회의(通商會議)를 한 후 명일(明日) 11시 향항(香港, 홍콩)으로 향(向)할 예정이오. 향항에서 10여일 체류(滯留)한 후 귀국(歸國)할 것이니 약(約) 7월 14일경이 될 것이오···.’
이 편지 사연으로 보아 영국을 떠나 로마에 도착한 것이 7월 2일인 것으로 추정된다. 25년 만에 다시 돌아보는 서구 제국(諸國)이었으니 목당에겐 많은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라인 강의 기적을 보고 한강의 기적을 실현할 수는 없을까 묵상(黙想)에 잠기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