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한국무역협회를 이끄는 데 정치와 관권(官權)을 배제한 순수한 업종경제단체(業種經濟團體)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명한 회원 상사들의 협력으로 훌륭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산업자본가(産業資本家)들 사회는 개개 기업인들이 관권과 정치 세력과 결합하여 기업을 확대하는 추세였고 자유경쟁 원리보다는 관권이용(官權利用) 경쟁에 더욱 부심하게 되어 음성적 정치자금 제공의 폐습과 기업인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커지고 있었다. 이것이 4·19 학생혁명으로 노출되어 주요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규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6·25 남침이 있었던 1950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기간 즉, 전쟁경기(戰爭景氣)와 원조자금에 의한 건설경기(建設景氣)를 통해 서서히 자본이 발아(發芽),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이미 시중은행을 장악할 수 있는 저력을 보였으며, 섬유·화학·식품 등 경공업 분야에서 중소 스케일을 벗어난 매머드 기업으로서의 준비를 모색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비로소 재벌이라는 용어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국가자본(國家資本)과 관료의 헤게모니 장악 아래 졸부(猝富)를 이룩한 신흥재벌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규탄의 소리는 높았고 과도정부(過渡政府)는 부정축재처리법(不正蓄財處理法)을 제정하고 조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한부 정권을 담당한 허정 내각(許政 內閣)은 부정축재자 처단을 차기 정권으로 넘겼고 장면(張勉) 정권이 이 문제를 넘겨받게 되었다.
그런데 수권정당(受權政黨)인 민주당은 7·29 선거를 치르는데 신·구파의 세력권 확보를 위한 분규도 있어서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결국 정치자금을 산업자본가들로부터 공여받는 대신 부정축재 처벌을 완화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목당은 일본과 영국에서 자본주의발달사(資本主義發達史)를 공부했고 일본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수행하는데 특정의 부상(富商)들에게 특권을 준다던가 그것을 특별히 보호한다던가 해서 그들에게 치부(致富)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며 그것이 국부(國富)의 형성을 가져오는 정책의 일환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즉 정부로부터 특권적(特權的)인 보호를 받는다든지 유리한 거래를 통해서 거부(巨富)를 쌓은 정상(政商)들 가운데서 뒤에 거액의 자본을 축적하여 일본 경제를 지배하기에 이르는 재벌이 탄생되고 있었다. 이들 재벌들은 뒤에도 정부와 결합하여 크고 작고 간에 정부와의 거래를 통해 성장해 가는 것이며 그 정상적(政商的) 성격은 산업자본의 단계에 이르러 약간 희박해지고는 있었지만 끝까지 없어지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부는 형성되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대자본주의(大資本主義)와 더불어 재력과 권력의 결탁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 국왕은 상인들의 수중에서 놀아났고 상인들은 의원이 되어 대외정책은 상인들을 위해서만 수입되는 형편이었다.
일본이나 영국이나 정상들을 통해 재벌이 조성되고 국부가 형성되어 경제적인 자유주의가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나라가 경험한 부조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었고 그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내어 현명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목당은 그런 현명함을 영국 의회의 공개 토론과 타협 정신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정권(政權)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국왕 혹은 노련한 장관들이 국내 여러 층의 신분 계급과 협의해 가면서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더불어 모든 자유를 국민에게 허용할 수 있었다. 요컨대 영속성(永續性)과 순응성(順應性)이란 덕성(德性)을 영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당이었다.
제2공화국이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를 다루는 데 국민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자본가(資本家)들과 뒷거래를 하는 비열한 행동을 취할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공론(公論)에 붙이고 국민들과의 합의점(合意點)을 찾아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960년 12월 3일, 산업자본가들은 경제인들의 단결과 협동, 새로운 경제논리(經濟論理)의 확립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수호라는 이념을 내걸고 한국경제협의회(韓國經濟協議會, 가칭(假稱)) 창립 준비 간담회를 열고 1961년 1월 10일에는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발족하고 있었다. 이는 경제가 정치에 예속되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왔던 일부 재계 인물들에 의해 추진되어 발족을 본 것이다. 경제협의회의 당면 문제는 부정축재자의 처단이었다. 협의회는 2월 15일에 가서 현실적인 타개책을 강구키로 하고 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방직협회·건설협회 등 4개 주요 경제단체의 협조를 요청해 왔다.
무역협회로서는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협의회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협회 입장은 무역을 통한 부정축재 대상자가 거론되고 있지 않은 마당에 부정축재자 처신 문제를 임원회(任員會) 안건으로 상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다만 다른 경제단체들과 보조를 맞춘다는 뜻에서 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한편 협의회는 정치자금의 모금도 주관하고 있었다.
한국무역협회로서는 대자본가 집단인 한국경제협의회의 출현을 환영할 만한 일로 보았다. 협회로서는 독립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당은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을 통한 국부의 형성을 추구하는 것이 국책(國策)으로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흥정으로 부정축재자 처단 문제를 논의하는 마당에 무역협회가 나서거나 개입할 것은 아니었다.
목당은 19세기 자유주의 무역의 승리를 주장한 맨체스터파(派)의 주장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보다 값이 싼 곡식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방직을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무역이란 순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팔 수 없게 된다. 수입을 막기 위해 해안을 봉쇄한다면 우리의 수출도 끝장이 날 것이다.
보호무역(保護貿易)으로 보호할 산업도 없고 가공수출비(加工輸出費)에 장래를 걸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국민적 이익이 무역업자들의 개별적 이익 추구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무역협회 회장인 목당이 이런 자기주장을 협회에서나 대외적으로 주장한 일은 없다. 그가 뒤에 제6대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그의 이와같은 주장이 처음으로 표면화되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