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7년에서 1959년에 이르는 3년은 목당(牧堂) 이활(李活) 주변이나 학교 재단에도 색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학교 재단은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1000여 권의 기증도서와 국내 인사의 기증도서가 잇달아 들어와 도서관 시설의 확장이 부득이하게 되어 중앙도서관의 서고(書庫) 증축이 있을 정도였다.
하버드 대학에서 어문·정치·경제 및 사회관계 도서 6000여 권, 워싱턴 대학으로부터 경제·경영학 관계 도서가 5000여 권이 들어왔고, 그 밖에도 카네기 재단(財團)에서 법학 관계 도서 200여 권을 비롯하여 미국의 각 출판계와 대학에서 기증해 온 것이 많았다.
도서관에는 4개의 일반 열람실 592석과 참고열람실 68석, 정기간행물실 48석, 대학원 열람실 48석, 그리고 유엔(UN) 도서 열람실 14석이 있어 자유 열람실을 합하면 도합 900여 석의 규모가 된다. 그리고 1962년에는 다시 제3열람실 84석을 증설했다.
그 후에도 국내외에서 잇달아 도서를 기증해 왔는데 특기할 것은 1964년 8월에 초대 총장이었던 현상윤(玄相允)의 장서를 그 장손 현재경(玄在慶)이 기증해 온 일이다. 현 총장은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를 전공하여 서애문집(西厓文集, 존선 중기 문신 유성룡(柳成龍)의 시문집)·율곡전서(栗谷全書,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의 시문집)·송학대전(宋學大全) 등 사상사에 관한 귀중한 문헌을 많이 수집하고 있었는데, 113부 515원으로 된 그의 장서 전부가 기증되어 온 것이다.
그간 목당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유당의 향배였다. 그칠 줄 모르는 부패와 독선이 극에 달한 상태였던 것이다. 1958년의 5·2 민의원 선거는 폭행과 납치·협박·공갈 등 테러를 비롯하여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들어가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1년 가량 앞두고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李起鵬)을 지명하고 나섰다. 집권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사이에 일대 결전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과 금권을 가진 자유당이 선수를 치고 나서자 민주당도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출범 때부터 내포하고 있던 신·구파의 세력 다툼을 치러야 했다. 신파측은 부통령직에 있는 운석(雲石) 장면(張勉)을 옹립하고자 했고, 구파측은 당 대표최고위원장직에 있는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을 옹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상(理想)으로 말하면 사전합의로 지명이 이루어져야 했으나 두 파는 제가끔 자기네 세력이 우수하다고 믿고 양보하려 하지 아니하니 결국 표대결(票對決)만이 해결책이었다. 이해 11월 26일, 시공관에서 지명대회가 열려 지명투표(指名投票)를 했는데, 3표 차리로 유석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운석은 자동적으로 부통령 후보로 낙착되었으며 당 대표최고위원직엔 운석이 선출되었다. 최고위원엔 유석·곽상훈(郭尙勳)·박순천(朴順天)·김도연(金度演)의 면면들이었다. 그런데 1960년에 접어들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유석은 지병인 위병(胃病)이 점차 악화되어서 선거전을 치르지도 못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1월 29일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1월 30일 워싱턴에 도착한 유석은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2월 3일 자유당 정부는 농번기를 피한다는 구실로 선거를 3월 15일로 앞당긴다고 발표했다.
정치 도의(政治 道義)를 떠난 잔인한 기습이었다. 이때 유석의 신병은 예상 외로 중환이어서 개복수술(開腹手術)을 받아야 했다. 위암(胃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2월 14일, 돌연 심장마비로 급서하고 말았다.
목당은 신문 보도를 통해 비보(悲報)를 전해 들으며 민주당의 겹친 불운(不運)을 안타까워 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서로 단일 후보가 된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의 4선은 이미 확정된 것으로 투표와 개표라는 절차만 남았으나 문제는 부통령 선거에 있었다.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 사력을 다해야 했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째는 대통령직의 계승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고령으로 4년 임기를 보장할 수 없으므로 그 계승권을 갖게 되는 부통령직에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했다. 둘째는 부통령 선거를 통해 두 당은 국민의 지지도(支持度)를 측정하는 심판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유당이 참패한다면 2년 뒤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막을 길이 없으리라는 예견 때문이었다.
조병옥 후보의 어이없는 서거로 민중은 흥분하여 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이 연설장에 나서면 그때마다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들어 술렁거리게 되었다. 목당은 필연코 무슨 큰일이 저질러지고야 말 그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에 반비례하여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인기는 일락천장(一落千丈, 신망이나 위신 따위가 동시에 여지없이 떨어져 버림)으로 부정한 방법 아니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부정선거에 앞서는 것은 자금이었다. 이것은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자유당은 각 은행과 기업체를 상대로 70억 환 규모의 자금을 염출했다. 산업금융채(産業金融債)와 농업금융채권(農業金融債券)을 발행하기로 하고 이것을 4개 시중은행에 인수시키기로 하고 그 자금을 친자유당계(親自由黨系) 기업체에 융자해주는 데 몇 할을 가로채는 방법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면밀한 부정선거 작전을 세우고 부정선거의 훈련을 시키는 등 치밀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민주당으로서는 대통령 후보 없는 정·부통령 선거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으나 5·15 선거 때처럼 부통령 후보만이라도 당선케 함으로써 다음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해 두자는 데 목표가 있었다. 민주당 유세반(遊說班)이 지방 도시에 나타나기만 하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경찰은 눈이 뒤집혀 저지책을 부심하게 되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 장면 후보의 정견발표가 있게 되었다. 휴일이어서 더 많은 시민의 방청이 있을 것이었다. 자유당측이 취한 것은 관공서의 정상적인 출근과 학생들의 등교명령(登校命令)이었다.
일단 등교시간까지 학교에 나왔던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비열한 처사에 항거하여 하오 한 시경 학원의 자유와 인권의 옹호,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악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집단으로 교문을 박차고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한 시 반경 경북도청 앞까지 이르렀을 때 긴급 출동한 경찰의 저지로 학생들은 일단 해산하게 되었다. 이날 연행된 학생들은 30여 명에 이르렀다. 민주당 선거대책본부(選擧對策本部)에는 매일매일 수십 건의 고발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대구 학생 데모 후 각 도시에서는 꼬리를 물고 데모가 터졌다. 마치 폭풍전야(暴風前夜)와도 같이 스산한 저기압 속에서 선거일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3월 15일, 마침내 선거는 실시되고 전국 도처에서 부정투표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정투표용(不正投票用)으로 나돌고 있는 투표용지가 고발되어 민주당에 의해 증거물로 압수되고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들은 도처에서 아우성을 쳤다.
마산에서는 경찰과 자유당 완장부대의 삼엄한 포위 속에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민주당 마산시당(馬山市黨)은 오전 10시 선거 ㅍ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당원들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3·15 선거는 불법이므로 무효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면서 그들이 행진하자 시민 수백 명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마산시청을 향하여 전진하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하자 이들은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민주당 시당사(市黨舍) 주위에 모여 있던 1000여 명의 궁중들은 민주당 간부가 경찰에 연행되어 갔음을 알고는 마침내 폭발했다. 데모 군중은 시청 방면으로 전진하고 이에 경찰대도 마주 출동하였으나, 물밀 듯이 밀고나가는 시위군중은 이를 물리치고 남성동 파출소 쪽으로 몰려갔다. 급기야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고 곤봉을 휘둘러 무차별 구타전을 전개했다. 유혈을 본 군중은 북마산 파출소를 포위하고 투석으로 대항했다. 이런 판국에 이번에는 출동한 소방대가 전주를 들이받아 마산 시내는 일시에 암흑천지가 된 속에서 파출소에서 켜놓은 석유램프가 쓰러지면서 화염에 휩싸였다. 4, 5시간 동안 아비규환으로 소용돌이치다가 통금 시간 가까워서야 평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