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72]범야권, 3선 도전 이승만 막기 위해 민주당 창당

2016-07-2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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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72)

제4장 재계활동 - (67) 우의마의(牛意馬意)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재단(財團) 주무이사(主務理事)로 취임하면서 바로 개교 50주년을 맞아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보통은 이사회(理事會)를 소집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일이 있으면 들르면 되는 정도였지만 취임과 동시에 50주년 행사도 행사거니와 재단의 재정상태(財政狀態) 파악 등으로 목당은 매일같이 출근을 해야만 했다.

무역협회 시절은 협회를 찾는 회원 상사 인사들을 대면하는 일이 거의 전부였고 실무는 전무의 전결(專決)에 맡겨 놓고 있어서 운영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었지만 학교재단 주무이사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이사회의 의장으로 회의나 진행하면 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은 교수회(敎授會)에서 처리되는 대학자치제(大學自治制)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재단측으로서도 학교의 움직임에 대해 소홀할 수 없었다.

정계(政界)는 여전히 자유당의 횡포와 이에 저항하는 야당 세력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의 선포로 본회의장에서 총퇴장한 야당의원들은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 제1공화국 때인 1954년 대통령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노리고 강행한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하기 위해 결성한 범야당 연합 모임. 당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 의원은 물론 자유당 탈당파, 무소속동지회 및 순수 무소속의원 등 60여명이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대여 투쟁을 벌이기 위해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결성)를 구성,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신당(新黨) 조직에 나서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서거 뒤인 1955년 9월 19일, 마침내 신당 민주당(民主黨)의 창당을 보았다.

기존 민국당(民國黨)은 발전적 해체(解體)를 하고 전원이 민주당에 참여한 것이다. 이리하여 정계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은 1956년의 제3대 정·부통령 선거전으로 집중되었다. 불과 7, 8개월 앞으로 임박한 선거전을 앞두고 조직된 민주당은 지방 조직에 박차를 가하여 유세(遊設)에 역점을 두고 이승만(李承晩)의 권력 집중이 빚어내는 허다한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었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은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李起鵬, 만송(晩松), 1897~1960년)을 지명하여 두 사람을 러닝 메이트로 해서 정·부통령 선거전을 서두르게 되자 민주당에서도 3월 28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대통령 후보에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0~1956년), 부통령 후보로는 운석(雲石) 장면(張勉, 1899~1966년)을 지명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뒤이어 진보당(進步黨, 가칭)에서도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曺奉巖, 죽산(竹山), 1898~1959년), 부통령 후보에 박기출(朴己出)을 각각 지명했다.

이보다 앞서 이승만은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의 3선(三選)은 민주주의에 배치되므로 출마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보낸 바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나서는 “국정을 시정하기 위해서 다른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은퇴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관제(官製) 민의(民意)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이승만의 이른바 ‘불출마 성명(不出馬 聲明)’은 추종세력들에게 그의 보도(寶刀)인 민의대(民意隊)의 동원 지시와 같은 것이었다.

목당은 불출마 성명 기사를 읽으며 “또 한 번 소란해 지겠군!”하고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에는 벌써 민의대가 경무대(警務台) 앞에 도열하고 번의(飜意, 먹었던 마음을 뒤집음)를 애소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서울 시가지엔 통행을 마비시키면서 우마차까지 동원하여 대통령의 번의를 애소케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소동을 지켜보며 세간에서는 ‘우의마의(牛意馬意)’라고 냉소와 조소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 제3대 대통령과 제4대 부통령 선거를 5월 16일 실시한다고 공고함으로써 정계는 이미 선거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과격한 선거구호를 내걸고 권력과 금력을 쥔 자유당과 대결하게 되었고, 자유당은 유세 방해, 테러와 공무원 및 정부 관리업체의 임원과 그 가족까지도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를 지지하도록 강요하고 나섰다. 민주당 선거운동원의 구타와 투옥·공갈은 다반사로 일어났고 부정·불법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탄압에 반비례하여 민의는 자유당으로부터 더 멀리 이탈해 가고 있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 정견 발표회는 50만이란 사상 최대의 군중이 운집하여 열광하였으니 민심의 소재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한강 백사장 유세를 끝낸 이틀 후인 5월 5일 호남지방 유세를 위하여 4일 밤 민주당 유세반(遊說班)을 대동하고 기차편으로 서울역을 떠나 전북 이리(현 익산)역을 얼마 앞둔 5일 새벽 돌연 해공(海公)은 옷을 챙겨 입고 일어서려다가 졸도했다. 같은 열차에 탔던 한 의사가 응급조처코자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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