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정보화의 후진국 러시아에서 10년간 유학중이었던 까닭에 더욱 컴퓨터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2000년 여름, 정말 식음을 전폐하고 독학으로 컴퓨터와 인터넷를 공부했다. 전문가 수준에 올랐을 무렵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부모님 사업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당연히 홈페이지 제작을 외주를 줄까 하다가 이것도 독학으로 배워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러 힘들게 HTML(홈페이지 언어)을 공부했다.
이때 접했던 책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PowerShift)이었다.
책 한 장, 한 장이 감동의 물결이었다. 21세기는 디지털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앨빈 토플러의 말은 젊은 가슴을 휘어잡았다.
실제로 초보자의 홈페이지를 통해 디지털 혁명이 도래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어서 감동은 더했다.
그때 정말 엉뚱한 생각이 다시 일었다. “나 같은 범인(凡人)도 디지털 여론 조작을 통해 국회의원도 될 수 있겠다!” 필자의 과대망상이지만 실제로 디지털 활용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뭐든지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학교수를 꿈꾸다가 온라인평판관리 전문가로 전업한 것은 이때의 홈피제작 경험과 ‘권력이동’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이후 대학강단에 섰다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 캠프에 사이버팀장직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캠프에 미리 자리 잡고 있던 정무직 보좌관에 하루 만에 밀려나는 비운을 맛봤다.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의 돌풍이 일었고, 남다르게 돌풍의 원인을 지켜봤다. 이회창 캠프는 대세론에 안주하여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온라인은 달랐다. 온라인은 노무현 후보 세상이었다.
이회창 캠프의 온라인 대응은 너무 티가 나는 ‘댓글 알바’로 조롱의 대상이었다. 선거에서의 ‘권력이동’(PowerShift)이 세계 최초로 벌어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결국 노무현 후보가 대망을 이뤘다.
그렇다면 노무현 캠프와 이회창 캠프의 경쟁력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CEO의 ‘디지털 마인드’의 차이였다. 잘 알려진 대로 이회창 후보는 컴맹이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노무현 후보는 1994년부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하는 IT전문가 겸 변호사였다. 97년에는 ‘노하우’(Knowhow) 통합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개발했을 정도로 박사급 실력을 갖추었다
. 이 ‘노하우’는 2002년 노무현 후보 공식홈페이지(www.knowhow.or.kr)의 도메인으로 쓰였다. 이처럼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는 2002년 대선 승패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필자가 2000년 고작 HTML언어와 디지털혁명을 이해하고 ‘국회의원’ 망상을 꿈꿨다면, 노무현 후보는 90년대에 이미 2002년의 정치 권력이동을 예측했을 것이다.
영국의 가디언은 2003년 “노 대통령은 HTML로 구현된 웹사이트 코드를 이해하는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높게 평가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정치 디지털혁명 사례가 있다.
18대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 12월 30일 필자는 여러 언론사에 칼럼 기고를 통해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당선을 전망한 바 있다.
당시 박근혜 위원장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여론조사에서 확연히 뒤지고 있었고, 당시 한나라당은 거의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 역술인도 아니면서 18대 대선에서의 박 위원장의 경쟁력을 예측했던 것은 바로 박 위원장의 ‘디지털 스킨십’이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박근혜 후보는 컴퓨터 공학 박사인 고(故) 이춘상 보좌관을 중용했다.
전통적으로 보수당 후보는 ‘디지털 마인드’가 약한데 박근혜 후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12년 박근혜 후보의 승리는 ‘디지털 마인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세계 최초로 ‘권력이동’(PowerShift)을 예측한 사람도, 또 세계 최초로 정치 ‘권력이동’(PowerShift)을 실현한 사람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동서양의 큰 별이 졌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