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그를 차세대 ‘신스틸러’로 만든 것은 ‘한 방’ 때문이다. 2000년 초반 KBS 대하사극 ‘왕건’의 보조 출연자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뒤 지금 것 주로 단역과 조연만 넘나들고 있다. 극 흐름 상 분명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역할들이었지만, 얼굴을 본 뒤 출연 영화 속 배역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아”라는 감탄사와 함께 박영서를 기억한다. ‘써니’ 속 운동권 오빠, ‘과속스캔들’의 라디오 AD, ‘해결사’에서의 해커, ‘죽이러 갑니다’의 닭백숙 배달부, ‘김씨표류기’의 철가방, ‘공공의 적 1-1’의 학생 조폭 등.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직 배역을 고를 위치는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여러 감독님들이 기억 해주시고 알아봐 주시는 건 정말 고맙고 즐거운 일이죠. 운 좋게 제게 꼭 맡는 역할들이 절 찾아 준거라 생각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헤드’ 속 백정(백윤식)의 하수인 ‘용이’ 역도 그를 위한 배역이었다. 감독이 2006년 ‘천하장사 마돈나’를 본 뒤 박영서의 연기에 매료돼 이번 영화에서 그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든 것.
용이는 극중 백정의 지시에 따라 홍제(류덕환)를 감시하는 인물로, 겉으론 순수한 듯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이중적 캐릭터다. 박영서는 이번 영화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용이’ 캐릭터에 몰입해 여러 선배 주연급 배우들을 넘어선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신을 거둬 준 시체 브로커 백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사건에 나선 인물이 용이에요. 백정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불쌍한 면도 있지만 한 편으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죠.”
‘헤드’를 찍으면서 감정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박영서.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부분에서 계속 ‘웃어라’고 주문하는 감독의 지시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단다. 그 만큼 복잡하면서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이 용이였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감독님과 배역에 대해 조금씩 만들어 갔죠. 점점 용이가 이해되면서 홍제와 대화가 되더라구요. 영화 속 제가 나오는 장면 모든 대화는 촬영 당일 모두 감독님과 함께 즉흥적으로 만든 대사입니다.”
하지만 조금은 안타깝다고 이내 아쉬워한다. 홍제와 용이의 시퀸스 중 상당부분이 편집됐다는 것. 용이란 인물을 설명하는 데 분명 필요했던 부분이지만 여러 제반 사항 상 편집이 불가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화 전체에 분위기를 살리는데 필요한 임팩트는 충분했다.
작은 배역이지만 강해 보이는 인상 덕에 출연 작품마다 존재감을 본 듯 했다. 이 같은 질문에 박영서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문자 그대로 ‘반반’이란다.
“데뷔 초기에는 분명 작은 배역이라도 나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죠. 정말 급했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나란 존재를 드러내려 힘을 앞세웠죠. 하지만 요즘은 단 한 장면이 나오는 역이라도 나를 지우려 노력합니다. 이제 겨우 1부터 100까지 가운데 1이 무언지 알 것 같아요.”
그는 지금도 여러 작품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이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주연에 대한 욕심도 분명히 있을 터. 지난해 영화 ‘죽이러 갑니다’로 당당히 주연 신고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힘을 뺐다고 공언한 그에게 배역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 박영서란 배우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주연에 대한 욕심은 당연히 있죠. 하지만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오는 입장에서 그런 부분을 논하는 것은 건방지다고 생각해요. 좀 더 배워야죠.”
강하고 독특하며 분명한 선을 가진 배역만 맡아온 그에 대한 선입견은 ‘어둡고 내성적’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활달함이 넘쳤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색깔을 알아봐 준 장훈 감독의 ‘고지전’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그리고 계속 배우로서 성장해 가는 게 목표입니다. 조만간 여자 친구와의 결혼도 계획 중이구요. 10년 가까이 저만 바라보며 뒷바라지를 해준 여자 친구에게 큰 선물을 해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