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삼성전자의 경기도 매탄동 수원사업장 한가족 프라자 2층은 삼성전자 임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선진제품 비교전시회' 관람을 위해 한데 모인 것. 지난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선진기업과 삼성의 제품·기술력 차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이 전시회를 열었다.
이에 삼성전자는 1993년부터 전시회를 열고 매년 주요 선진 기업들과 삼성의 제품을 직접 비교·시연했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앞선 기업들과의 격차를 빠르게 줄일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전시회는 첨단 분야에서 삼성이 세계 정상급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원동력에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로 41년째를 맞는 삼성전자의 역사는 '선진기업 따라잡기'로 요약할 수 있다.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 당시부터 삼성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앞선 기술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사업을 진행했다.
이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지속했다. 2008년 기준 삼성전자는 총 12개의 글로벌 1위 제품을 갖고 있다. 2005년 8개에서 3개가 늘은 것. 잠재적 1위 후보군을 모두 합하면 삼성전자는 총 20개 이상 부문에서 글로벌 넘버원 자리를 이미 차지했거나 근접해 있다.
때문에 전시회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전시회에 참석한 한 임원은 "최근 전시회에서 삼성보다 앞선 제품 수가 크게 줄었다"며 "오히려 삼성 제품이 경쟁사를 얼마나 앞섰는지를 평가하는 자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전시회 참관을 마친 이 전 회장은 "예전에는 선진 기업이라는 등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망망대해를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업체들과 외신은 삼성전자를 '스마트 팔로워'(Smart Follower)로 묘사하고 있다. 현명하게 선발 업체들을 따라감으로써 이들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4년째 전세계 TV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TV 부문에서 스마트 팔로워의 꼬리표가 떨어진것은 지난해 LED TV를 출시한 이후다. 이전까지 삼성은 소니 등 선발 업체가 선도한 기술을 빠르게 활용해 시장을 주도해왔지만 새로운 트래드를 창조하지는못했다.
휴대폰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프리미엄 시장 위주의 전략을 탈피해 노키아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높은 영업이익률 창출 능력을 벤치마킹했다. 이를 통해 1위와의 격차도 크게 줄였다. 그러나 새로운 트랜드 형성은 녹록치 않다. 애플이 소프트웨어의 강점을 앞세워 시장에서 선전한 반면 삼성은 최근에야 자체 플랫폼인 '바다'를 선보이며 뒤늦게 추격에 나섰다.
때문에 추격자 이상의 발전이 있어야 향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삼성 관련 서적을 다수 집필한 홍하상 작가는 "올해는 삼성의 약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시금석"이라며 "지금까지 타사를 벤치마킹하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부터는 삼성 스스로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일부 분야에서 삼성은 패러다임을 창조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해외 경쟁사와의 격차는 2년 이상이다. TV 역시 지난 25일 세계 최초로 3D LED TV를 양산, 지난해 LED TV에 이어 2년 연속 산업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전방위에서 메가트랜드를 주도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다. 전자와 조선 등 일부를 제외하면 삼성은 여전히 추격자의 위치에 있다. 국내 1위는 많지만 글로벌 1위까지 갈길이 멀다.
과거 이 전 회장은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문화가 정착하는데는 10년 가까이 소요됐다. 추격자에서 창조자로 변하는 것 역시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다. 끊임없는 노력과 각오, 구성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를 꾸려나갈 수 있는 구심점 역할도 중요하다. 20여 년 동안 경영의 핵심축이었던 이 전 회장은 공식적인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를 보좌했던 전략기획실(구 비서실·구조조정본부)도 해산됐다. 변혁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70년 동안 지속됐던 삼성의 시스템이 붕괴된 것.
때문에 삼성 내에서는 기존 시스템의 복구를 희망하는 주요 경영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삼성이 한단계 더 성장하느냐, 아니면 현재 자리에 머무르느냐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여론이 여전하고 삼성 스스로 내세운 약속을 깨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과거 시스템으로의 회기 역시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현상유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재 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