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장르'가 바뀌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으라차차 와이키키2' '스타트 업' '갯마을 차차차'를 통해 '로맨스 장인'으로 불리던 배우 김선호는 영화 '귀공자'와 디즈니+ 시리즈 '폭군', 단 두 편으로 '누아르 장르'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어떤 장르나 캐릭터든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김선호의 스펙트럼 확장. 그가 채 보여주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더욱 궁금해지는 때다.
디즈니+ 시리즈 '폭군'(감독 박훈정)은 '폭군 프로그램'의 마지막 샘플이 배달 사고로 사라진 뒤, 각기 다른 목적으로 '폭군 프로그램'을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벌이는 추격을 담았다.
"(반응이 좋아서) 기분 좋아요. 정말 즐겁게 찍은 작품이거든요. 애정이 큰 만큼 (반응도) 좋은 거 같아서 뿌듯해요."
"말 없고 묵직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저의 큰 숙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왜 이렇게 루즈하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거였어요. 미니멀한 움직임과 대사를 한다고 해도 목적을 잊지 말아야 했죠. 툭툭 농담을 던지고 신경전을 벌일 때도 상황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잘 전달하고 표현하는 게 중요했어요."
'최국장'은 그동안 김선호가 연기해 왔던 캐릭터들과 달랐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최국장'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데 설렘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동안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외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최국장'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제가 가진 캐릭터 중 '최국장'의 레퍼런스가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게 되었고 '최국장'의 레퍼런스로 삼으면서 제가 가진 캐릭터들과 접목해 나갔어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참 재밌었고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참고하며 절제된 감정과 미니멀한 움직임으로 감정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귀공자'도 의상 때문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봤었거든요. 이번에는 미니멀하면서 묵직한 표현을 위해서 영화를 참고했어요. 영국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도요. 정적인 인물이나 캐릭터가 강조되지 않는 인물은 내적으로 움직임 하나하나를 갈무리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다듬고 다듬으면서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절제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걸 계속 염두에 두면서 연기하려고 했습니다."
김선호는 이번 작품으로, 하여금 연기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침묵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깨달았어요. 이런 장르에서 말과 말, 행간에서 무언갈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정적인 캐릭터라도 안에서 끓고 있다면 (눈에) 보이는구나 싶더라고요. 이 '침묵'이 사람을 얼마나 상상하게끔 만드는지도. 하하. 배우가 이 침묵의 무게를 잘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 작품을 통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김선호는 '최국장'은 "철저하게 혼자"인, "고독하고 쓸쓸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감독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선악이 모호하잖아요. 그런 점들을 잘 살리고 싶었어요. 철저하게 혼자이고, 쓸쓸하고, 외로운 인물로 설정해서 드라마 말미에는 그의 모든 점이 '희생'으로 느껴질 수 있게끔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의 농담, 능글능글한 모습까지도 전부 희생이었구나.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지만 선배, 부하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였으면 했어요. '최국장' 눈앞에서 그들이 죽어갈 때의 반응을 고심하고 감독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런 디테일을 통해 '최국장'의 가치관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선호는 영화 '귀공자', 디즈니+ 시리즈 '폭군'을 통해 박훈정 감독과 두 작품째 만나게 됐다. 같은 감독과 같은 장르(누아르)를 찍는다니. 심지어 공개 시점도 비슷하여 우려의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김선호는 '귀공자'와 '최국장'을 완벽히 다른 결로 연기해 냈고 전작과 다른 면모를 드러내며 팬들을 안심시켰다.
"솔직히 처음 시나리오를 받을 때는 그런 걱정이 없었거든요? '귀공자'와 '폭군'이 연달아 공개될 줄 몰랐으니까요. 그냥 '박훈정 감독님이랑 또 작품을 하다니. 신난다'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공개될 시점부터 '비슷하게 느껴지면 어떡하지?' '내가 비슷하게 연기한 지점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던 건 박 감독님께서 (같은 연기를 했더라도) 다르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어요."
김선호는 박 감독에게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평소에도 박 감독의 팬이었다는 김선호는 세계관의 일원이 될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웃었다.
"감독님의 작품 속 세계관이나 캐릭터들은 만화 같은 요소가 많아요. 그런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느껴왔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만화책을 많이 읽고 굉장히 좋아했었거든요. 감독님의 영화는 만화책을 한장 한장 넘기는 것과 같은 재미를 줘요. 특히 액션신은 가슴을 두근거리도록 만들거든요."
올해 누아르 작품을 연달아 소개하며 스펙트럼 확장을 확인시킨 김선호는 다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입지를 굳힐 계획. 차기작은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로 결정됐다.
"누아르에서 침묵을 즐기고 미니멀하게 연기하다가 리액션을 정확하게 해야 템포감이 사는 로맨스물을 다시 하게 되니까 색달라요. 새삼 장르 구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선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로맨스물에서 그 인물이 온전히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상대를 바라보는지가 중요해요. 이걸 캐치하는 과정이 누아르보다 더 어려운 지점 같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돈되고 젠틀한 인물을 연기하게 됐어요. (고윤정 씨를) 바라보고 리액션하며 빛나게 하려고 해요. 정도를 조절해나가는 게 즐거우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데 하다 보면 또 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또 다른 페이지다. 1986년 생으로 40대를 앞둔 김선호는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새로운 챕터를 앞두게 됐다.
"20살 때도 '네가 지금 하고 싶은 연기는 마흔이 넘어서야 할 수 있다'라고 얘길 들었어요. 그때부터 이면의 슬픔을 밝음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속 홍반장이 딱 그랬거든요. 이제 40대가 되니 '하고 싶은 연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기대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못 따라갈까 봐서요. 개인적으로 요즘 '발성'에 꽂혀있는데요. 영상들을 계속 찾아보며 연습하고 있어요. 언젠가 좋아지지 않을까요? 연기라는 게 답이 없어요. 일상생활에서도 연기적인 부분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게 어느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되기도 하고 모든 게 연결되더라고요. 여러 가지 문을 두드려보며 고민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