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5일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반도체 특별법'을 발의한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중도층 포용을 위한 정책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로 보이지만 대부분 반대기업 정서에 편승해 대기업 지원 정책에 인색해 왔던 민주당이 반도체 육성을 위한 상당히 획기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 반도체 지원 방안을 준비하고 있던 정부·여당이 오히려 뒤통수 맞은 듯한 반응이 나올 정도다.
박 의원은 법안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국가 반도체 산업본부’를 설치해 경쟁력 강화와 기술 보호를 담당하게 하고 안보 및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검토해 반도체 클러스터 및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직접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전력·용수 등 반도체 산업을 위한 핵심 인프라 조성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확대하고 주 52시간제 적용도 예외를 둘 수 있게 했다. 미국·중국·일본·대만은 물론 유럽 주요국까지 반도체 산업 패권을 잡기 위해 지원에 나서자 여당은 반도체 산업의 빠른 지원을 위해 야당과 ‘원샷 입법’을 협의하기로 했다. 모처럼 여·야·정이 모두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된다.
반도체는 경제는 물론 안보에도 중요한 산업으로 전 세계가 육성을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 산업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뉴욕 증시에서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이 3조3350억 달러(약 4600조원)를 기록하며 MS와 애플을 제치고 1위로 부상하며 전 세계 투자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핵심에 생성형 인공지능이 있고 생성형 인공지능에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신속히 처리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가 핵심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를 두고 삼성과 SK하이닉스 간에 일전이 가열되고 있는 형국이다.
뿐만 아니라 마하 5 이상(초속 1.7㎞) 극초음속 미사일은 현재의 방어시스템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해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미사일인데 마하 5 이상으로, 그것도 복잡한 궤적으로 비행하면서 목표물을 정밀타격하려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신속히 연산해 내는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슈퍼컴퓨터에는 당연히 고성능 반도체가 핵심이다. 그만큼 반도체는 이제 외교안보에도 중요하다. 한마디로 반도체는 경제안보의 핵심 전략산업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반도체 설비투자액의 5~15%를 보조금으로 주고, 설비투자에 25% 세액공제를 적용 중이다. 주요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계획도 계속 발표하고 있다. 1980년대의 반도체 영광을 되찾으려는 일본도 반도체 투자액의 최대 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설비투자의 20%를 세액공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EU는 430억 유로 규모 반도체 보조금 지급 계획을 포함한 반도체법에 합의했다.
이처럼 전 세계 주요국이 경쟁적으로 반도체 기업을 위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늘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민주당 입장에서는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반도체 지원 법안은 자칫 민주당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인식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일본, EU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는 상황에서 야당의 반대로 한국의 지원이 불충분하다면 국내 반도체 투자 부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25일 제시한 ‘야당표 K칩스법’에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한국이 뒤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업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는 내용이 담겼다.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기존 15~25%에서 25~35%로 올리고, R&D 세액공제율은 30~50%에서 40~50%으로 상향 조정하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올해 일몰되는 세액공제 기간을 10년 연장하고, 국가전략기술 범위를 넓힌다는 내용도 첨단산업 업계에서 환영할 만한 내용이다. 국가반도체위원회를 설립한다는 안도 포함돼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반도체 지원안을 내놨다. 여당 안은 세액공제 연장 기간이 6년이라는 점, 세액공제율은 현행 제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번 야당 안과 차이가 있다. 여당 안은 국가반도체위원회가 아닌 ‘대통령 직속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한다는 점에서도 야당 안과 다르다. 정부도 최근 17조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포함해 총 26조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팹리스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를 중점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지금까지 여야와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지원안에 보조금 지급 방안이 빠진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업계와 학계에선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후공정, 소부장처럼 국내 기업 경쟁력이 비교적 약한 분야에 한해서라도 보조금을 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 경쟁력을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인센티브가 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야당표 K칩스법은 앞서 여당이 제시한 지원안, 정부 안과 함께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오를 전망이다. 반도체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기조 자체에는 여야·정부가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구체적인 세율이나 세액공제 기간을 비롯한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의견이 서로 다른 상황이다. 이견을 조율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은 만큼 향후 논의 과정에 수개월이 걸릴 가능성도 점쳐진다. 조속한 처리가 중요하다.
지난달 25일 발의된 더불어민주당의 '반도체 특별법'에 대해 국내 반도체 업계는 환영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허들 없이 빠른 속도로 집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대규모 투자를 앞둔 상황에서 이 같은 지원책은 더욱 큰 보탬이 됨은 물론이다. 삼성전자는 용인에 360조원, SK하이닉스는 평택에 122조원을 투자한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고덕 반도체 캠퍼스 증설에 120조원을, 기흥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증설에 20조원을 추가로 투자한다.
현재 19개의 생산 팹(fab)과 2개의 연구 팹이 가동 중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는 올해부터 2047년까지 622조원의 민간 투자가 이뤄져 연구팹 3개를 포함해 모두 16개의 팹이 새롭게 들어서게 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대만이 폭발적인 보조금 공세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무기가 생긴 셈"이라면서 "가장 큰 보조금은 '속도'라는 대통령의 말대로 신속한 처리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세제 혜택 이외에 전력 공급 등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강력한 지원도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급 문제가 도마에 오르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도 완공된 생산시설 가동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이 필요로 하는 대규모 전력을 충당하려면 태안 등 지역에서 전기를 끌어와야 하는데 송배전망을 비롯한 전력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또 송전망에 대한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미국, 대만 등 경쟁국들은 정부가 보조금을 통해 전력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고 해외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지난 정부의 무리한 신재생에너지 정책으로 비싼 신재생에너지 구입비용 폭증으로 200조여 원의 부채를 안고 있는 한전은 기업들에 '수익자 부담 원칙'을 거론하며 되레 송배전망 구축 비용을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는 고덕~서안성 송전선로는 주민 반대 등 갈등으로 2013년 건설 계획이 수립된 지 10년 만에, 당초 계획보다는 2년 ‘지각 준공’하기도 했다. 이 송전선로는 경기 안성시, 용인시, 평택시를 지나는 23.5㎞ 길이의 송전망이다. 3900억원의 공사비 전액을 삼성전자가 부담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 대부분의 전력을 공급한다.
한편 민주당은 이번 특별법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설치 지원 의무를 포함시켰다. 부채를 200조여 원이나 안고 있는 한전의 입장을 감안하면 무리한 내용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의 탈원전 폐기 국정기조에도 반하는 내용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생산 공장을 수급이 불안정한 신재생 에너지로 감당할 수 있을지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주민들과의 마찰도 넘어야 할 큰 문제다. 2019년부터 SK하이닉스가 총사업비 12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대규모 민간 투자 프로젝트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추진했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용인 처인구 원삼면 일대 448만㎡(135만평) 부지에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밝혔으나 주민들과의 마찰과 용수시설 구축과 관련해 여주시와의 인허가 협의가 해결되지 않아서 3년 이상 건설이 지체되기도 했다.
반도체 사업은 선발 주자가 시장을 선점하기 마련이어서 한시가 아쉬운 상황이다. 사업자에겐 글로벌 경쟁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가리는 운명의 시간이었던 만큼 참으로 경쟁력의 핵심인 귀중한 시간을 날려버린 것이다. 여야는 신속히 지원 법안을 통과시키고 정부와 지자체도 지역 갈등을 더 이상 기업과 주민들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책적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경제안보 전략산업 건설에 실기해서는 안 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과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 ▷서울지방시대위원장·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