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국힘 당권 4인방 …르상티망의 함정을 피하라

2024-07-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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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다. 국민의힘 지지자들도 대개는 그러했을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도토리 키 재기처럼 고만고만한 당권 주자 4인이 당과 보수 우파를 살릴 새바람을 몰고 올 거로는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 총선 참패에 대한 설욕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0일 당대표 출마(연임)를 공식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아직도 총선 참패 책임론에 매여 있는 국민의힘 주자들이 그와 맞서서 이길 수 있을까. 글쎄다. 어쩌면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조차도 ‘김건희 여사 문자 메시지’ 파문 등 갖은 잡음 앞에서 기대를 접지나 않았을까.
 
우선 지적하고 싶다. 대통령이 나라 밖에 있을 때는 내부 정쟁은 일시 중단하는 게 예의이자 관행일 터. 그런데도 경위야 어떻든 대통령은 물론 영부인까지 끌어들여 제2의 선거판을 벌인 셈이니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사활이 걸린 ‘탄핵전쟁’이 벌써 시작됐는데도 말이다.
 
‘어대명’은 보통명사가 된 지 오래다. '어차피 민주당 대표는 이재명'이라는 말 아닌가. 애초 당대표 선거에는 이 대표만 나오는 걸로 알려졌지만 막판에 김두관 전 의원과 김지수 한반도미래경제포럼 대표도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 대표로서는 ‘단독 출마’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됐다. 자칫 1인 출마가 됐다면 모양이 빠질 뻔했다.
 
이재명 대표는 사법 리스크로 쫓기고 있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대장동 사건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10월이면 1심 공판 결과가 나올 거라는 관측도 있다. 헌법 제84조도 논란거리다. ‘대통령은 내란‧외환의 죄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이 조항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진다.
 
여기서 이 점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필자는 그동안 이재명 대표가 한 많은 말 중 가장 치명적인 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한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박근혜라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누구는 이 말을 가십성 잡담 정도로 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한마디에 그 사람의 모든 것, 도덕성, 진실성, 인성까지도 담겨 있다. 누구든 그 함의를 한 번쯤 깊이 따져보기를 권한다.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인 줄 알더라”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입해보자. “사랑하다고 했더니 진짜로 사랑하는 줄 알더라.” 어떤가 느낌이. 이 대표에게 이 말은 두고두고 흠결로 남을 것이다. 선거 이전에 말이다.
 
국민의힘 어벤저스 4인은 이런 대권 주자와 싸워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준비가 덜 된 듯하다. 탄핵의 칼은 이미 춤을 추고 있는데 상호 비방과 ‘김건희 여사 사과’ 문제에만 매몰돼 있다. 어떡할 셈인가. 때로는 이들이 당대표 선거에 나선 것인지, 대선(大選)에 나선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대선이라면 오세훈 서울시장, 김동연 경기지사, 홍준표 대구시장 등 잠재적 후보들이 줄잡아 10명은 훌쩍 넘을 텐데 이들은 다 어떡하고? 모두들 조금씩 차분해졌으면 한다. 누구든 너무 나가면 되돌아오기 쉽지 않은 법이다.
 
다행히 그들에겐 함께 싸워야 할 공동의 적(敵)들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흔들고,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며, 정치적 불안정성을 키우고, 이미 세계에 입증된 우리의 문화와 창의성을 하찮게 여기는 세력들이 바로 그 적들이다.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자유도, 안정된 삶도, 발전도 포기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온 나라에 팽배한 '르상티망' 

이 중 가장 힘든 상대는 누구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요즘 부쩍 입에 오르내리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을 꼽는다. ‘르상티망’은 약자의 분노와 질투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철학자 니체가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한국 사회로 치면 약자와 강자, 없는 자와 있는 자의 구도가 심각하고 빈부 격차도 심한 불균형의 상태에서 흔히 약자가 갖게 되는 마음의 상태(원한)가 르상티망이다.(인터넷 ‘마음의 흐름, 니체의 르상티망- 약자의 분노와 질투’에서 인용)

마침 4·19 세대로 한국일보 주필을 지낸 원로 언론인 김성우씨(90)가 최근 캐나다에서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캐나다 한국일보’에 6월 27일부터 사흘간 게재한 글인데 시사점이 많아 어느 한 줄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제목은 ‘이것이 국민의 승리인가’. 같은 글방 관계자들과 아주경제신문의 허락을 얻어 그 일부를 원문대로 소개한다.
 
“··· 오늘날 한국의 시대정신은 르상티망이다. 약한 사람이 강자(强者)에게 갖는 원한과 증오심을 르상티망이라고 한다. ··· 르상티망이 온 나라에 팽배해 있다. 지난 총선은 전형적인 르상티망의 선거였다. 선거의 야당 측 주역들은 자신의 범죄혐의를 덮기 위해 복수 일념으로 검찰 독재 타도를 외쳤고, 많은 국민들은 이에 대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명품백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르상티망에 불을 질렀다. 야당은 이 악감정을 교묘히 이용하고 선동했고 성공했다. ··· 극단적인 증오는 극단적인 편애를 낳는다. 르상티망의 반작용이 극성 지지자들을 이끄는 팬덤이다. 팬덤이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광풍의 핵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상식 차원에서 본다면 르상티망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점도 부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표현이야 어떠했든 모두가 ‘르상티망’의 힘으로 또는 그걸 동력 삼아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것 아닌가. 그 공과(功過)와 과정은 언제든 이성적으로 톺아봐야 한다.

르상티망은 바꿔 말하면 반(反)엘리트주의다. 과거 엘리트들에게 가졌던 존숭(尊崇)의 마음이 사라지면서 갖게 된 엘리트 경시 현상이나 반감(反感)의 총체가 반엘리트주의다. 쉽게 말하면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는 거다. 엘리트들이 오랜 세월 누렸던 우월적 지위와 특권을 더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다. 남보다 더한 노력, 앞선 공부, 칼 같은 혜안이 있어서 이만큼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왔다는 것도 인정하기를 꺼린다.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이런 의식을 갖고 있으면 능력 있는 소수가 결정하고 끌고 간다는 생각은 갈수록 고전이 된다. 아직도 엘리트주의의 미덕과 효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친 김에 4인에게 충고하나 하겠다. 무엇보다 르상티망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거다. 4인은 모두 좋은 머리, 좋은 대학, 남보다 유복한 환경, 국내 최고 수준의 인적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닌 세상으로 우리는 바삐 옮겨가고 있다. 어떤 성취도, 아름다움도 르상티망에게 걸리면 빛을 잃거나 오히려 짐이 되는 세상이다.
 
교과서처럼 재미없는 얘기겠지만 현대사회와 정치, 특히 민주주의 나라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르상티망과 포퓰리즘의 결합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결혼 중 하나가 이 둘의 결혼이다. 이건 악성 중 악성이다. 둘 다 서로를 잡아당기는 힘도 워낙 강해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가장 최근에 이를 절감케 한 게 코로나 팬데믹과 지난 총선 때 민주당이 약속한 국민 1인당 25만원 현금 지원이다. 피땀으로 쌓아올린 나라를 하루아침에 베네수엘라로 만들자는 것인지, 분명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


다중적 복합 위기의 시대
 
바야흐로 다중적 복합 위기의 시대다. 위기에 위기가 덮침으로써 해법도 출구도 안 보인다. 위기를 뚫고 나아가야 할 정부·여당은 손발이 묶이거나 잘려버린 형국이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부 보수 우파 시민단체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할 정도다. 그럴수록 선배들의 지혜와 경륜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필자는 최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한 언론사(매일신문)와 인터뷰한 내용을 대학 동창 소개로 숙독한 바 있다.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총장은 국내외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북핵을 비롯한 남북 관계, 한·일 관계,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심지어는 우리 교육 문제까지도 잘 정리돼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한다.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는 2021년 펴낸 영문 저서 <‘Resolved: United Nations in a Divided World(한국어 표제 ‘반기문 결단의 시간들’)>에서 자신의 정치 참여와 포기에 대한 경위와 심경을 상세히 밝힌 바 있다. 우리 어벤저스 4인이 가장 자주, 가장 진지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우선 반기문이라고 나는 느꼈다.
 
어디 반기문뿐일까. 생각과 지향점이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날 것을 권한다. 개혁 보수 우파, 합리적 중도 우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말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이재오)가 올해 6‧10 민주항쟁 37주년을 맞아 내놓은 슬로건이 뭔지 아는가.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다'! 나는 이 말이 좋다.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도 나왔던 ‘더 큰 대한민국, 더 따뜻한 대한민국’도.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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