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짜이는 하노이에서 항구 도시 하이퐁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하이즈엉성, 찌린현에서 태어났다. 호는 윽짜이(Ức Trai, 抑齋)이다. 부친은 응우옌응롱(Nguyễn Ứng Long:1356~1429)이고, 외조부 쩐응우옌단(Trần Nguyên Đán:1325~1390)은 쩐(陳) 왕조 말기에 재상을 역임한 시인이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명문 유학자 집안으로, 응우옌짜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0세 때인 1400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어사(御使)로 제수되었다. 부친 응우옌응롱은 외조부 쩐응우옌단의 요청으로 응우옌짜이의 어머니가 되는 쩐티타이(Trần Thị Thái)의 가정교사를 하였다. 어느 날 쩐티타이와 정을 통한 게 뜻하지 않게 임신이 되자 혼쭐이 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도주를 하였다. 이에, 쩐응우옌단은 응우옌응롱을 찾아오도록 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을 시키고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응우옌짜이다. 응우옌짜이의 부친 응우옌응롱은 쩐(陳) 왕조(1225~1400)에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였으나, 호(胡) 왕조(1400~1407)에서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이름을 응우옌피카인(Nguyễn Phi Khanh)으로 개명하였다. 응우옌짜이의 형제는 모두 다섯이었는데, 모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부친이 처가에서 5형제를 키웠다. 1390년에 응우옌짜이의 외조부가 사망하자 부친이 혼자서 두 집안을 모두 책임지게 되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부친 밑에서 성장한 응우옌짜이는 쩐 왕조의 패망으로 정국이 혼란스런 가운데서도 시행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외조부 쩐응우옌단이 쩐 왕조에서 재상을 역임하였음에도 호(胡) 왕조를 세운 호꾸이리는 쩐응우옌단의 후손들을 호(胡) 왕조에 입조시켜 중책을 맡기고, 쩐 예종을 응우옌짜이 부친의 사가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1407년에 명나라가 침략해 오자 호꾸이리는 전력을 다해 항전하였지만, 패전을 거듭해 건국 7년 만에 망하고 호꾸이리를 비롯한 많은 대신들이 포로로 잡혀 명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부친과 포로로 잡혀가던 응우옌짜이는 나라를 다시 세우라는 부친의 권유를 받고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응우옌짜이는 레러이가 영도하는 람선 의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결국, 20년에 걸친 명나라와의 투쟁 끝에 나라를 되찾았고, 응우옌짜이는 레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레 태조는 개국공신 응우옌짜이에게 자신의 성을 하사하여 응우옌짜이는 레짜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 태조(1428~1433)의 뒤를 이은 레(黎) 태종(1434~1442)이 1442년 9월 1일 찌린에 있는 꼰선사(昆仙寺)를 방문하자, 은퇴 후 1437년 말부터 꼰선에 머물고 있던 응우옌짜이는 왕을 알현하고, 미모가 뛰어나고 문장에 능했던 자신의 첩 응우옌티로(Nguyễn Thị Lộ)로 하여금 태종 왕을 보필케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442년 9월 7일 레찌비엔(Lệ Chi Viên-박닌(Bắc Ninh)성, 자빈(Gia Bình)현, 다이라이(Đại Lai)면에 있는 리치 과일 정원)에서 왕이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9월 9일 황급히 장례를 치르고 시중을 들었던 응우옌티로가 왕을 시해했다는 죄를 물어 응우옌짜이와 응우옌티로를 잡아 9월 19일에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내렸다. 이로써 레(黎) 왕조의 1등 개국공신인 응우옌짜이는 예기치 못한 음모에 연루되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22년이 지난 1464년에서야 레(黎) 성종에 의하여 신원이 복원되었다.
‘빈응오다이까오(平吳大誥)'의 탄생 배경
응우옌짜이는 1400년에 태학생으로 선발되어 호(胡) 왕조의 관리로 등용되었으나, 호 왕조는 명나라의 침략을 받아 7년 만에 망하였다. 이에, 레러이(Lê Lợi, 黎利)는 명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1418년에 람선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응우옌짜이도 레러이 장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레러이 장군은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레 왕조를 세웠다. '빈응오다이까오'는 레러이 장군이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다이비엣(大越)국이 명나라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1428년 응우옌짜이가 작성하여 온 백성에 알린 글이다. 베트남 역사상 제2의 독립선언서로 간주되는 1,259자로 구성된 베트남 고전문학의 걸작이다. '빈응오다이까오'는 “오(吳)나라를 평정하고 크게 알림”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베트남을 오(吳)나라로 한 것은 중국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관계를 비교하여 명나라를 오(吳)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빈응오다이까오(平吳大誥)'의 역사적 가치
응우옌짜이는 ‘빈응오다이까오'를 통해서 베트남의 민족주의 정신과 베트남 민족의 웅혼함을 보여주고 베트남 민족이 선비의 민족임을 만천하에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중국과는 산천의 강역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며, 베트남 민족은 명나라처럼 포악한 민족이 아님을 만천하에 고하고 있고, 북쪽에서 한(漢), 당(唐), 송(宋), 원元)나라가 있었으나 우리 또한 남쪽에서 한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힘의 균형이 무너져 강약이 서로 다를 때도 있었으나, 베트남도 결코 호걸들이 세를 이어가며 부족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빈응오다이까오'는 명나라와 20년간을 싸워서 나라를 되찾고, 레 왕조를 세운 베트남 민족의 웅혼함을 노래한 작품이다.
산천의 강역이 다르고,
남북의 풍속 또한 다르니라.
조(趙), 정(丁), 이(李), 진(陳)으로부터 비롯된 아국(我國)은,
한(漢), 당(唐), 송(宋), 원元)나라와 더불어 각기 한쪽에서 웅거하였노라.
비록 강약이 서로 다를 때가 있었으나,
호걸들이 세를 이어가며 부족하지 않았도다.
쩐(陳) 왕조를 폐하고 호(胡) 왕조를 세운 호꾸이리가 혼란기에 민심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나라가 혼란스럽게 되자 명나라가 침략하여 백성들에게 끼친 해악과 백성들의 고초를 웅혼한 문체로 기록하고, 이 고초를 잊지 말고 나라를 지키자고 하는 기록문이다. 응우옌짜이는 명나라의 악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동해의 물로 그 더러움을 씻는데 부족하고, 남산의 대나무로 붓을 만들어 그 악함을 글로 적기에도 부족하니 신과 백성이 함께 분히 여기고, 하늘과 땅이 용납지 못할 지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신이 산을 이루고 초야는 피로 진홍빛으로 변하고, 궁지에 몰린 적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항복하였고, 포로로 잡힌 적장은 굶주린 호랑이가 구걸하듯 꼬리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무(神武)는 죽이지 않는 것이라고 적장을 죽이지 않는 아량을 베푸는 승자의 도를 다하였다고 했다.
1076년 리트엉끼엣(Lý Thường Kiệt, 李常傑;1019~1105) 장군은 밤마다 꺼우강(sông Cầu) 전투에서 송(宋)나라 병사들이 듣도록 읆은 시가 제1 독립선언문 ‘남꾸옥선하(南國山河)'이다. 남국에는 남국의 황제가 있으니 물러가라는 내용으로 베트남은 결코 송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350년 뒤에 제2 독립선언문 ‘빈응오다이까오'가 나왔고, 다시 약 500년이 지난 1945년에 호찌민 주석이 선언한 독립선언문을 제3의 독립선언문이라고 한다. 끝으로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은 천지신명과 조상의 영(靈)이 살펴주고 음우(陰佑)하였음에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응우옌짜이가 남긴 ‘빈응오다이까오'가 있어 베트남이 문화민족으로 인정받고 당당한 독립국가로써의 민족 자존심을 대내외에 공포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조선대 교수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