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류큐(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12일 백악관 인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마오쩌둥의 공산화 야욕에 맞선 미국의 필수 방어 지역에서 한국·대만을 뺀 것이다. 애치슨은 방어선 밖의 안보에 대해서는 "공격을 받으면 최초 책임은 그 국민에게 있다. 그다음은 유엔 헌장에 의거해 전 문명 세계의 책임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아시아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던 애치슨 장관은 “이 방어선 밖의 지역이 침략당했을 때 안보를 보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았던 당시 애치슨 장관 발언은 한반도에 유사 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주변국에 확산시켰다. 실제 5개월 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애치슨은 수십 년간 "북한의 남침에 '청신호'를 준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김일성이 '미군 불개입'을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미국 야당 의원들은 물론 6·25전쟁 영웅 리지웨이 사령관도 애치슨에게 책임을 물었다. 1952년 대선 유세 때는 아이젠하워가 애치슨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미국 정부의 판단은 우연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 국가부채의 GDP에 대한 비율이 코로나로 인해 2020년에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100%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더욱 악화될 전망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미국이 동맹국 방어를 위해 국방비를 충분히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20년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2021년 철군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깊이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미국 정부의 급증한 부채가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예산통제법에 의해 국가부채의 GDP에 대한 비율이 100%를 넘어면 미국 양원의 인가를 받아야 지출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최근에도 재정지출을 하지 못하는 재정절벽 상태에 직면하기도 했다.
<미국의 국가부채/GDP 비율>
2년 전 러시아가 침공할 하루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인 10명 중 7명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고 한다. 서방의 러시아 전문가들 역시 “냉철한 푸틴은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전쟁에 절대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러·우 전쟁은 벌써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리란 신호는 항상 있었지만, 우린 그걸 애써 무시했다”고 후회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의 점령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분단국가로 종전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수년 내 러시아와 나토 간에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암울한 예상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핀란드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수십 년간 유지해온 비동맹 원칙을 깨고 나토 가입 신청을 했고 지난해 4월 회원국이 됐다. 스웨덴은 이번 달 정식으로 32번째 회원국으로 합류했다. 헝가리 의회가 지난 2월 25일 스웨덴의 나토 가입 비준안을 통과시키자 나토 동진에 대응해 러시아는 14년 전 폐지했던 동부 군관구를 부활시켰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대응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비용 부담 압박에 대응해 2030년까지 유럽산 무기 비중을 50%까지 채우는 것을 골자로 한 방위산업전략을 발표했다. 전략에 따르면 EU 회원국들은 2030년까지 국방 조달 예산의 최소 50%를 EU 내에서 지출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2035년에는 목표치가 60%로 확대된다. 또 전략에는 EU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신규 구매하는 군사장비의 40% 이상은 공동구매로 조달하고 EU 내 방산 거래 규모를 35%까지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방위산업전략의 목표는 EU 회원국들의 방산업체를 활성화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무기 자급자족을 높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2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EU의 무기 수입 비중은 80%에 달했고 이 중 60% 이상을 미국이 차지했다. 이처럼 나토는 트럼프가 나토 방위비 문제를 거론하며 유럽이 자체적인 안보 강화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러·우 전쟁과 중동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민주’와 ‘독재’로 갈린 국제적 대립은 날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상황이다. 이 두 개의 전쟁으로 ‘국제 정치’란 현상을 만드는 세계 각국의 역학 관계가 마치 도미노처럼 재편되고 있다. 유럽 정치권에선 "전쟁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북유럽과 동유럽 발칸 국가들이 잇따라 나토에 손을 내밀고, 복지 예산까지 줄여가며 군비 증강에 나서는 것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전쟁의 파장은 바다를 넘어 동북아로 들이닥치고 있다. 러시아·중국·이란·북한 간 밀착이 유럽·중동의 지정학적 위기를 한반도로 전이(轉移)하는 형국이다. 사실상 종신 집권을 하게 된 시진핑이 종신 집권 명분을 중국의 통일에서 찾기 위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 등장하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와 평화통일'을 내세웠다. 그러나 시진핑이 사실상 종신 집권에 나서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크게 세 가지 배경이 거론되고 있다. 첫째, 미·중 관계 악화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심화되면서 미국이 대만 카드를 흔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이 홍콩 사태에서 보인 것과 같이 무력 사용도 불사하는 강경 대응을 통해 대만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다.
둘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중국도 대만 침공을 못할 것 없다는 관측이다. 셋째는 시진핑의 집권 연장 야심이다. 헌법을 수정해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이지만 2027년 네 번째 연임을 위해선 명분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대만 통일이 매력적인 전략으로 대두되고 있다. “전쟁은 불가피하며 언제 얼마나 크게 싸울지가 문제”라는 견해도 등장하고 있다. 마잉주(馬英九) 전 대만 총통은 지난 6월 “전쟁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그저 “언제 얼마나 크게 싸울지는 양측의 대처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양안 전쟁은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 내부의 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이에 따라 지리적으로 우선 가까운 주한미군이 동원되고 그 공백을 북한이 노릴 수도 있어 대한민국이 가장 큰 피해 국가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다. 우리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한국은 과연 이에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동맹에 기초해 실리를 추구한다’는 모호한 방법론이나 한반도와 그 주변국에 매몰된 근시안적 안보 전략으로 살길을 찾기엔 너무나 거칠고 복잡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한이 체결한 '9·19 군사합의'로 전방 방어시설 파괴, 대공 정찰 무력화, 서해·동해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Northern limit line) 무력화 등 약화된 대북 방어력을 재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최근 발생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향토예비군과 상시 민방위 훈련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향토예비군 훈련도 강화하고 실효성 있는 상시 민방위 훈련도 강화하는 등 유비무환의 방위전략과 경제안보 핵심 산업 육성 전략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할 때다. 러·우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는 드론 등 첨단무기가 전쟁을 좌우하고 있다. 첨단 방위산업 육성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때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과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 ▷서울지방시대위원장·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