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근의 아주경제적 시선] 1980 '서울의 봄' 이후 한국 경제가 호황 누린 까닭

2024-02-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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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
[오정근 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



요즘 전두환 대통령의 ‘12·12 사태’를 그린 영화 ‘서울의 봄’이 인기인 듯하다. 일부 대학 게시판에는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며"를 제목으로 한 대자보도 붙었다고 한다. 대자보를 내건 학생은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며 분노와 슬픔, 답답함 등 여러 감정이 들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픽션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는 픽션과 사실을 넘나들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영화를 통해 역사를 평가하는 데는 작지 않은 위험성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12·12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는 후일 역사가들이 잘 할 것이고 여기서는 ‘12·12 사태’로 집권하고 제5공화국을 연 전두환 대통령이 이루었던 경제 안정,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처음으로 이룬 안정이므로 ‘대안정’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하리라고 생각되는 경제적 성과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정치적 판단은 별개로 경제적 성과는 통계로 알 수 있기 때문에 후학들의 교훈을 위해서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필자가 굳이 경제 대안정이라고 명명한 데는 재임 기간 중 한국 경제 발전 사상 처음으로 고도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경상수지 흑자와 물가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이 경상수지 흑자를 처음으로 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공장 하나 없고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공장 지을 설비 자재나 자원을 비싸게 사와서 물건을 만들어도 신생 개도국 상품을 제값에 사 줄 나라가 있을 리 없다. 1970년대 자주 보았던 풍경인 한국이 주로 아프리카 국가원수들을 자주 초빙했던 이유다. 할 수 없이 싸게 팔 수밖에 없고 결과는 경상수지나 무역수지 적자다. 한국은 경제 개발 시작 후 줄곧 적자를 기록해 왔고 그 결과 외채는 증가 일로였다. 그러한 적자 행진을 처음 흑자로 전환시킨 해가 1986년이다. 비로소 한국 제품이 제값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때가 한국이 중진국 대열로 올라선 해로 본다.
물론 이때 저달러(엔고)·저금리·저유가라는 3저 효과도 컸지만 그러한 대외 환경을 잘 활용해서 경제 안정화 정책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 경제 발전 사상 처음으로 2%대 물가 상승률(1984~1986)과 10%대 성장률(1981~1987 10.2%)이라는 고성장·저물가에 1986년부터는 만성적인 적자였던 경상수지마저 흑자를 달성했던 것이다. 한국 경제 발전 사상 후학들이 배워야 할 만한 감히 경제 대안정이라고 명명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어떤 경제 안정화 정책을 추진해서 이처럼 성공을 거두었나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 경제 안정화 정책은 1960~1970년대 정부 주도의 성장 우선 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즉 1970년대 중반까지 상당한 효과를 보였던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경제 규모 확대와 더불어 민간 부문의 사업영역이 점차 확대됨으로써 그 효과 면에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79년 세계 경기 침체와 제2차 석유파동 등 대외 경제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추진된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따른 설비투자 급증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정부 주도에 의한 경제 운영 방식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그 유효성 면에서 한계를 보임에 따라 정부는 근본적으로 경제 운용 방향을 성장 우선 정책에서 안정 우선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 국내 경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국내 정치 불안 및 중화학공업 육성책 여파 등으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보인 데다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이 크게 높아지고 경상수지 적자가 대폭 확대되는 등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국제 원유 가격이 1979년 3월 배럴당 13.3달러에서 1980년 8월에는 30달러로 상승하면서 국내 물가가 급상승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기 침체까지 겹쳐 수출마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같은 1980년대 초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책 당국은 중장기적 시계에서 일련의 경제 안정화 정책을 견실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함으로써 경제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동안 지속되었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원화를 대폭 평가절하하는 동시에 복수통화바스켓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국내 통화가치를 현실화하고 환율의 가격 기능을 제고하였다.
이와 아울러 정부는 원화의 평가절하에 따른 수출 증대로 국내 경기가 다소 회복을 보이기 시작한 1982년부터 강도 높은 재정 지출의 긴축을 통해 재정수지의 건실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전년 예산을 기준으로 새해 예산을 편성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여 사업의 타당성을 기준으로 하는 제로베이스방식(zero-base -budgeting system)을 도입하여 이전까지 30%를 상회하던 재정지출증가율(통합재정 기준)을 10% 내외로 안정시키는 등 긴축기조를 계속 유지하였다.
통화정책에 있어서도 1980~1982년 중에 연평균 27%대에 달하던 총통화 증가율을 국내 경기 회복이 본격화된 1983년부터는 10%대로 하향 조정하여 1985년까지 지속시킴으로써 재정 긴축으로 조성된 물가 안정 기조를 더욱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책 당국에 의해 추진된 경제 안정화 정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물가 안정 기조하에서 경기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경상수지 적자 불균형이 꾸준히 개선되는 등 상당한 경제 성과를 가져왔다. 특히 물가 안정 기조의 정착은 실질실효환율을 절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수출을 활성화하고 경상수지 적자 폭을 축소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마침내 1986년 사상 처음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하고 1988년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드디어 100억 달러를 돌파해 128억 달러에 이르고 올림픽도 치렀다. 100~200대를 횡보하던 주가종합지수가 1986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하여 1989년 3월에는 966까지 상승하고 대한민국에 마이카 붐도 일면서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장기간 급등한 주가가 조정을 거친 후 다시 상승을 시작해 드디어 1994년 9월 1000을 돌파해 한국 주식시장에 신기원을 달성했다. 경제만 보면 전두환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에 이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달성한 ‘흥국(興國)’ 대통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 성과에 대해 국내 경제정책보다는 대외적 요인, 즉 3저 현상(저달러·저금리·저유가)에 크게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양호한 대외적 경제 환경(3저 현상)을 최대한 이용하여 총수요관리정책으로서 통화, 재정 및 환율정책의 기조를 적절히 조화롭게 운용함으로써 경제의 안정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5공화국 이후 정부들이 정치논리에 휘둘려 안정화 정책에 성공한 예가 드문 것을 고려하면 의의가 매우 큰 기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5공화국 김재익 경제수석이다. 1960년 서울대 문리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은행에 수석 합격해 사회에 진출했고, 1968~1973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취득 이후 귀국한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일했다.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 상임위원장이 되어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그에게 경제 과외도 했다. 김재익의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했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김 수석이 독자적으로 경제 안정화 정책을 진두지휘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김재익 수석은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하면서 강성 노조가 등장하고 임금이 급등하고 안정화 정책도 흔들리면서 성장률은 하락하고 물가 상승률이 1987년 7.1%까지 올라가고 경상수지도 1990년에 다시 적자로 추락하면서 1997년 12월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안타깝게도 한국 경제는 5공화국 시절 같은 고성장·저물가·경상수지 흑자를 동시에 달성하는 안정화 시기를 아직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과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 ▷서울지방시대위원장·바른언론시민행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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