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 담당 인력도 부족한데 밸류업 프로그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오히려 공시 부담만 가중되는 거 같아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첨단 반도체 공정 장비를 개발·생산하는 코스닥 상장사인 A사 재무회계 담당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사 내 공시 인력을 따로 두지 않고 본업에 겸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정부가 최근 내놓은 밸류업 프로그램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26일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국내 상장사들의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기업 스스로 기업가치를 높일 만한 계획과 달성 목표를 세워 이행하고 투자자와 잘 소통하는 기업에 세제 지원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해 중·장기적으로 다수 기업의 가치를 높이겠다는 게 핵심 골자다. 기업의 낮은 자본 효율성 등으로 주요국 대비 기업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당초 정부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한 만큼, 상장사들이 밸류업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명시적인 불이익이나 제재를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발표 당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관련 브리핑'에 나선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은 자율적인 프로그램으로 가이드라인에 있는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8일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열린 '금융감독원장-연구기관장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장사가)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거래소 퇴출이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주주환원 관련 지표를 만들고 이에 미달했을 경우에 대한 논의를 연구 단계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틀 전 밸류업 지원방안을 발표하면서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주주환원 계획 수립과 이행을 권고했는데, 미흡한 수준에 시장 퇴출이라는 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상장사 재무회계 담당자들은 금융 당국 일각에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관련 페널티가 도입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여건이 나은 기업들이 먼저 나서서 결국 다수 기업이 참여하는 흐름이 형성된다면 홀로 '대세를 거부하는 회사'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형성되고 있다. 또 막상 참여를 하려면 공시를 통해 이행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 중소 상장사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초안에 따르면 참여 기업은 연 1회 홈페이지 및 한국거래소를 통해 자사 기업가치 제고 활동에 대해 자율 공시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공시에 담을 내용은 '현황진단'을 포함해 △목표설정 △계획수립 △이행평가 및 소통 등 방대한 편이다.
일각에서는 대기업들도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이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시 자체에 투입할 자원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부담을 호소한다.
반도체 후공정 테스트를 주력 사업으로 두고 있는 B사 관계자는 "솔직히 현업에 쫓겨 이런 게(밸류업 프로그램) 있는지 뒤늦게 알았다"며 "대기업에 맡겨도 속시원히 할지 장담 못 하는데,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참여하기에는 공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또 "결국 참여하려면 공시 인력을 더 뽑는 게 유일한 방법인데, 사람 한 명 뽑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마땅한 지원자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귀띔했다. B사 시총 규모는 2000억원 수준이지만 본사가 지방에 있어 그만큼 채용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초안으로 발표한 밸류업 지원방안에는 기업들이 이러한 부담을 상쇄할 만한 혜택이나 이 문제를 해소할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평가다. 기업들은 "세제 개선, 상법 개정 등 추가 지원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힌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에 따라 법인세나 상속세 감면 같은 방안이 오는 6월 발표될 최종안에 담기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