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저성장 고착화' 韓경제 …'산업정책 3.0' 펼쳐야

2024-01-31 16:32
  • 글자크기 설정
최남수 서정대학교 교수
[최남수 서정대학교 교수]



컨설팅 기업인 맥킨지코리아는 최근 한국 경제의 향후 진로에 대해 심층 분석한 ‘한국의 다음 S커브(Korea’s next S-curv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2013년에 한국 경제를 ‘서서히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한 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10년 만이다. 이번 보고서의 문제의식은 심각하다.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하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도약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게 맥킨지의 경고이다. 한국 경제는 1960~19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로 제1의 성장 S커브를, 그리고 1980~2000년대에는 첨단 제조업을 선두에 내세워 제2의 성장 S커브를 그렸다. 지금은 다음 성장곡선을 펼칠 때이지만 낮은 생산성과 기둥 산업의 경쟁 심화,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격차 등으로 경제에 먹구름이 끼어 있다는 진단이다. 맥킨지는 한국 경제가 제3의 성장 S커브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개편, 전환,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개편은 산업구조와 비즈니스 모델 개편을, 전환은 고부가가치 포트폴리오로의 전환과 원천기술 기반의 신사업 창출 등을, 그리고 구축은 규제 점검을 통한 산업 혁신 기반 구축 등을 의미한다.
 
맥킨지의 처방은 한마디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산업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산업구조를 바꾸고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규제 혁파를 해가는 등의 대응은 그 자체가 바로 산업정책의 틀 내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글로벌 무대에서는 정부의 귀환과 이에 따른 산업정책의 부활이 중요한 화두로 부상해 있다. 2008년의 금융 위기로 시장의 힘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가 퇴조한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 미·중 패권 경쟁, 공급망 위기, 기후변화 등 여러 변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미국과 EU(유럽연합) 등은 공격적인 산업정책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저 ‘2024 한국 경제 대전망’에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둘러싼 강대국 간 산업정책 경쟁은 세계 산업지도를 다시 그리는 산업 군비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선두권으로 치고 나가기 위한 한판 승부를 각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는 얘기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에서 일어났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이란 말은 기피 대상이었다. 워낙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국방 외의 다른 산업에 개입하는 데 미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국가 주도의 경제 모델로 미국과의 격차를 좁혀오고 코로나 확산 등 위기 상황이 가시화되자 미 정부는 산업 육성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중반에 발효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 과학법이다. IRA의 경우 모두 7730억 달러의 예산을 기후변화 대응, 친환경 에너지산업 육성, 청정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산업 지원 등에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중 4330억 달러는 풍력터빈과 태양광 패널, 배터리 등 에너지 생산·저장 시설의 제조 지원과 신규 및 중고 친환경 차 판매의 진작 등에 쓰이고 있다. 또 반도체 과학법은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미래 기술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군멍군식으로 산업정책의 깃발을 들기는 EU도 마찬가지. EU는 그린 딜 산업계획을 내세우고 나왔다. 이 계획은 규제 간소화, 자금 조달 촉진, 기술 역량 강화, 공급망 다변화 등을 통해 청정기술 산업을 육성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특히 탄소중립산업법을 제정해 친환경 산업에 대한 규제를 줄이고 기술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EU 역내 생산을 확대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핵심 원자재법을 만들어 제3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줄이면서 원자재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EU는 이와 함께 반도체 부족을 해소하고 기술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430억 유로 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는 내용의 EU 반도체법도 마련했다. 미국의 반도체 과학법에 대한 맞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EU가 이렇듯 산업정책 강화 쪽으로 급선회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앞세운 중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은 산업의 육성 자체가 국가 주도로 이뤄진다. 대표적 정책이 제조 강국으로의 도약을 선언한 ‘중국 제조 2025’이다. 이 계획은 전 세계 제조업 강국 중 선두권 지위를 확보한다는 청사진 아래 차세대 IT 기술, 항공우주장비, 로봇, 바이오·의약 등 10대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제의 핵심 경쟁력을 좌우하는 제조업에서 선두로 치고 나가겠다는 중국의 공세는 미국과 EU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세계 3대 경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중국, EU가 ‘산업정책 대전(大戰)’을 본격화했다.
 
그렇다면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떠오른 산업정책은 의도한 만큼의 효과를 가져올까? 실패한 적도 있지만 성공한 경우가 더 많다는 평가이다. 산업정책이 맥을 못 춘 대상은 중국 정부가 보잉과 에어버스의 과점에 도전하기 위해 자체 상업용 항공기 제작에 나선 프로젝트이다. 이 사업은 기술적 문제와 공급망 애로에 직면해 큰 차질이 빚어졌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이 이른 시간에 미국 정부 주도로 개발된 게 산업정책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이다. 미 정부는 민간 제약사가 감당하기 힘든 재무적 리스크를 대신 떠안아줌으로써 백신 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 유럽의 항공기 제작 회사인 에어버스도 산업정책이 주효한 사례이다. 1960년대 후반 유럽은 보잉이 독점한 항공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항공기 개발에 따른 자금 조달 등을 도와준 데 따른 것이었다. 에어버스는 현재 보잉과 함께 항공기 시장에서 쌍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산업정책이 다른 나라보다 더 친숙한 축에 들어간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성장 과정 자체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을 통해 정부 주도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은 과거의 산업정책을 ‘1.0’과 ‘2.0’으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산업정책 1.0은 공업발전법의 틀 아래 개별 산업의 업종별 혁신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외환위기 이전까지 시행됐다. 이에 비해 산업정책 2.0은 외환위기 이후에 본격화했는데 특정 업종을 돕기보다는 산업발전법 체제에서 산업발전의 기초가 되는 기술, 투자, 인력, 금융 등을 지원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산업정책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그동안 정부는 이런저런 산업정책을 발표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과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신성장 4.0 전략과 국가첨단산업 육성 정책, 그리고 최근 발표된 ‘세계 최대·최고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들 정책이 산업 구조조정의 부진과 신성장 동력 부재, 그리고 기업 경쟁력 약화 같은 구조적 문제를 풀어나갈 창의적인 산업정책 3.0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 경제는 저성장 기조의 고착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주력 산업의 개편과 새로운 산업의 육성이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본질적인 전환을 가속화할 신산업정책이 긴요하다. 더구나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산업정책 경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때이다. 그런 만큼 큰 시각에서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방향성에 대해 재점검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추격형 사고에서 벗어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가는 선도자로서의 산업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등이 공저한 ‘그랜드 퀘스트’에서 제시한 차세대 배터리, 초미세·초저전력 반도체 등 미래 산업의 승부처는 정부가 정보의 우위에 설 수 없는 만큼 민간이 이를 주도하게 하되 정부는 민관 공조 체제를 통해 옆에서 이를 측면 지원하는 ‘넛지 전략’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도 리스크가 큰 기술 개발은 정부가 초기 연구를 수행해 그 성과를 민간기업에 공유하는 기업가형 정부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인터넷 등 다수의 정보통신기술이 위험을 감수한 미국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가져온 결과라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책 거버넌스도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공학한림원은 ‘담대한 전환’에서 디지털 전환 시대의 산업정책을 이끌 새로운 법제가 필요하다며 산업발전법의 전면 개정을 주문하고 있다. 한림원은 특히 정부 조직의 불투명한 역할 분담 탓에 산업구조 개편이 추진력을 갖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산업혁신의 관점에서 산업부와 중기부, 과기정통부의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정도로 획기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원 또한 산업별 담당 부서가 산재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부 내 산업혁신정책의 협업체계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백악관 내에 설치된 총괄 조정기구처럼 컨트롤타워를 두거나 영국처럼 정책 간 중복이 심하거나 융합이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공동 장차관 임명과 고위 공무원단의 겸직 등 부처 간 칸막이를 낮추기 위한 융합적 인사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경제는 성장동력을 복원하고 혁신적인 ‘퍼스트 무버 산업’을 창출해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맥킨지가 얘기한 것처럼 끓는 냄비 밖으로 개구리를 꺼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시도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제3의 성장 커브를 펼칠 ‘산업정책 3.0’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부의 치열한 고민과 혜안, 그리고 과감한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