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흐트러졌다. 일사천리로 기업 경영의 새로운 틀로 자리 잡는 듯하더니 역풍이 생겼다. 주로 미국 쪽에서다. 석유기업 등을 자금줄로 삼고 있는 공화당이 민주당 정부의 ESG 확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공화당의 표적이 된 ESG 전도사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ESG란 용어가 너무 정치화됐다며 이 말을 그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ESG 주창자 중 한 명인 린 포로스테 드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홀딩스 회장은 심지어 “ESG란 말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까지 얘기했다. ESG가 지나치게 정치화돼 새로운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도 나왔다. ‘ESG 파이코노믹스’ 저자인 알렉스 에드먼스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연초에 ‘ESG의 종언’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에드먼스 교수는 “ESG는 매주 중요하지만 특별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고 언급했다. ESG가 기업에 장기적 수익을 가져다주는 기업문화나 혁신 역량 같은 다른 무형 자산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소음은 조금 있지만 새로운 경영의 틀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ESG. 한국 기업의 현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형식적인 면에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갈 길이 먼 지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전체 성적표를 들여다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18개국 52만여 기업을 대상으로 ESG 점수를 분석한 결과 한국 기업의 ESG 점수는 11.50점으로 글로벌 평균치인 20.66점을 크게 밑돌고 있다. 부문별로 보면 지배구조(G)가 전체 평균치 대비 44.5%(13.28점)에 불과해 가장 저조했고, 다음으로 환경(E)이 51.2%(6.47점), 사회(S)가 67.5%(13.28점)로 집계됐다. 세계 수준과 큰 격차가 있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의 ESG 등급은 부진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국ESG기준원이 공표한 2023년 등급을 보면 가장 높은 S등급을 받은 기업은 하나도 없다. A+ 기업도 전체 중 2.4%인 19개에 그쳤다. ‘불합격’이라고 볼 수 있는 B·C·D등급은 전체 상장사 791개 중 459개로 60%에 달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ESG 경영의 형식을 갖춰가고 있는 반면 규모가 작은 기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황이 드러난다. 통상 ESG 경영을 얘기할 때 우선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은 ESG위원회 설치와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여부다. 먼저 ESG위원회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중 대기업집단은 63% 넘는 기업이 이를 두고 있는 반면 기업집단에 들어가지 않은 기업의 설치 비율은 6.95%에 불과하다. ESG보고서로 불리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도 상황은 같다. 자산 규모가 2조원 넘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보고서 발간 비율은 66%인 데 비해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상장사 전체 평균 비율은 9%에 머물고 있다. 자산 규모가 작을수록 보고서 발간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이 5000억원에 못 미치는 상장사는 발간 비율이 1%에 불과하다.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성과가 좋지 않은 사안들도 있다. 대표적인 항목이 탄소중립 목표 수립. 전체 상장사 중 13.6%인 126개만 이 목표를 세운 상태다. 다양성과 포용성으로 불리는 남녀평등 이슈도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상장사 중 여성 사외이사를 최소한 한 명이라도 둔 비율은 2018년 10.6%에서 2021년 3분기 현재 51.5%로 크게 올라 문제가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 전체 사외이사 중 여성 비율이 7.4%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최근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생물다양성에 대한 대응은 어떨까? 관심을 가지고 대응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 외국 기업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데 있다. 해외 기업들은 생물다양성 손실을 복원하는 방안을 경영 전략 안에 포함해 추진하는 특징을 보인다. 자연이 훼손된 것보다 더 많이 회복시키겠다는 ‘네이처 포지티브’에 시동을 건 세일즈포스나 삼림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선언한 제지업체 인터내셔널 페이퍼가 대표적인 예다. 이에 비해 한국 기업들은 아직은 전략적 고려 없이 나무 심기나 천연기념물 보호 등 사회적 책임 활동 일환으로 생물다양성 이슈를 다루는 모습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ESG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엇갈리는 의견이다. 기업은 환경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ESG 평가기관들은 지배구조에 가장 큰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다. 평가기관이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기업으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사안인 지배구조 문제를 다루는 데 소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다 보니 ESG를 규제로 보는 시각이 한국 기업에 지배적이다. 실제로 탄소 배출량 공표를 뜻하는 기후공시, 탄소 배출에 대해 관세 수준으로 재무적 부담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세, 공급망에 대한 환경·인권 실사 등 관련 규제가 잇따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ESG북 집계에 따르면 ESG에 대한 정책적 개입 건수는 2001~2010년 473개에서 2011년 이후에는 1255개로 크게 늘어났다. 중요한 점은 ESG를 규제로만 간주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으로 보면 ‘고개 숙여 땅만 바라보다가 별을 놓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부분이 외국 기업과 한국 기업이 크게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KPMG가 최근 펴낸 ‘2023 CEO 전망’을 보면 미국 경영진 중 74%는 ESG를 가치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5년 안에 ESG 투자로 상당한 수익을 얻을 것으로 전망하는 CEO 비율은 82%에 달하고 있다. 이들 미국 CEO는 ESG가 재무적 성과는 물론 고객과의 관계, 브랜드, 평판, 인재 확보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딜리전트 연구소와 스페넛스튜어트가 글로벌 기업의 이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ESG를 기회로 본 기업 비율이 75%에 달했다.
ESG는 경영과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환경을 보호하고 사람을 돌보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내재화해서 기업의 중장기 가치를 제고하는 데 본질적 목적이 있다. 기업가치를 키우는 게 ESG 경영을 해나가면서 바라보고 가야 할 ‘별’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많은 해외 기업들은 ESG 본연의 목표를 제대로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스테와 유니레버가 대표적 ‘역할 모델’ 기업이다. 핀란드 기업인 네스테는 2009년 기존 정유사업으로는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비즈니스 모델을 정반대인 재생에너지 쪽으로 전환하기로 결단했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고 투자자와 직원, 소비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마침내 세계 최대 재생연료 생산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도 10억명 이상 건강과 복지 개선,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 절반 감축 등 야심 찬 계획을 담은 ‘유니레버 지속가능생활계획(USLP)’을 10년 동안 추진해 목표도 달성하고 뛰어난 경영 성과를 올렸다. 두 기업 모두 ESG 경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기업가치를 크게 높인 사례다. 한국 기업들이 ESG를 주로 규제로 체감하는 것은 역사가 짧아 이런 성공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멀리 내다보며 ‘별’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ESG가 당장은 입에 쓸지 모르지만 결국은 기업 체질을 질적으로 개선해 가치를 키우는 ‘양약(良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