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의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공급망. 제품의 생산과정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지역적으로 연결돼있는 가치사슬의 핵심축이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듯하던 공급망은 최근 들어 그 안에 구조적인 불안 요인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팬데믹 기간에는 록다운으로 멈춰섰고, 한두 가지 부품의 생산 차질로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또 무역분쟁의 와중에서 핵심 부품은 상대국을 향한 무기로 변질되기도 했다. 더 큰 틀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의 국면 속에서 공급망을 ’내 편’과 ’네 편‘을 가려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업 자체 활동뿐만 아니라 자회사와 협력사의 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식별하고 이를 예방·완화·제거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권의 경우 근로조건, 아동노동, 강제노동, 뇌물과 부패방지, 결사의 자유, 단결권, 단체교섭권 보장 등이, 또 환경은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대기·토양·수질 오염, 천연자원 과소비, 폐기물 관리 등이 실사 대상이다.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지구 기온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한 파리기후협약에 부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2030년과 2050년까지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를 설정하며, 공급망 내 기업의 탈 탄소 수준을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다. 유념해서 봐야 할 대목은 실사 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 수준이다. 행정적으로 벌금이 부과되는 것은 물론 공공조달 입찰과 유통, 그리고 수출이 금지될 수 있다. 고객사와의 거래가 중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위반 기업을 대상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EU 차원의 움직임과 별도로 개별 국가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노르웨이는 유사한 법률을 이미 시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국가의 의회에는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위구르 강제노동 금지법‘이 발효됐으며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공급망 투명성법이 제정돼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 실사의 법제화 추세로 당장 EU지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EU에 법인이나 지사를 설치한 기업은 물론 공급망에 포함된 기업까지 지침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5월에 내놓은 ’공급망 실사 대응을 위한 기업 지원 방안‘에서 “실사 의무는 EU 역내뿐 아니라 역외기업에도 적용되고 공급망 전반에도 의무화해 수출기업에 상당한 영향이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특히 대(對)EU 수출이 많은 자동차와 부품업종 등을 중심으로 중소·중견 기업을 포함한 상당수 국내기업에 부정적 여파가 미치고 공급망 안에 있는 협력업체도 간접 영향권에 들어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현재 EU에 수출을 하는 국내 기업은 1만80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대기업이 527개, 중견기업이 1181개, 그리고 중소기업이 1만6206개 사다.
문제는 국내 기업의 대응 태세가 매우 취약하다는 데 있다. 대한상의가 내놓은 ‘2023년 ESG 주요 현안과 정책과제’ 조사 결과(기업 300곳 대상)를 보면 공급망 실사를 가장 큰 ESG 현안으로 본 응답 비율이 40.3%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대비 수준은 낮았다. 단기적 대응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원청기업의 48.2%, 협력업체의 47.0%가 별다른 조치가 없다고 답했다. 신경은 크게 쓰고 있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급망에 대한 부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체적인 공급망 실사에 들어감은 물론 탄소 감축 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협력업체들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영국계 은행인 스탠다드차타드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다국적 대기업의 탄소 배출량 중 공급체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3%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은 협력업체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78%의 대기업은 2025년까지 탄소 감축에 진전이 없는 협력업체와의 거래를 끊겠다는 입장인데 35%의 기업이 공급망에서 배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BMW가 3년 평균 150여 개사를, 그리고 GE가 2020년 기준으로 71개사를 공급망에서 빼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다.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국내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전경련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낸 30대 그룹 소속 7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8.7%인 44개사가 ‘협력사 행동규범’을 만들어 협력회사가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규범에는 근로시간 준수, 강제근로 금지 등 인권과 온실가스 관리 등 환경, 안전보건, 기업윤리, 경영시스템 항목이 들어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글로벌 공급망이 환경과 인권 등 ESG의 가치를 내재화하는 쪽으로 탈바꿈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관련 기준이 낮은 기업 또는 국가에서 높은 기업과 국가로 공급망이 이동하는 대수술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감안했으면 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해본다. 먼저 정부는 국제 통상협상 무대에서 공급망 규제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공급망 실사 논의는 EU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이뤄지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적응을 위한 부담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통상협상을 통해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하고 더 나아가 기후공시나 지속가능공시처럼 국제 표준안을 만들어가는 방안도 검토됐으면 한다.
다음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정부 관련 부처의 공동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EU 지침안을 보면 내용이 상당히 포괄적이다. 환경 부문에서는 국내 기업이 가장 취약한 영역인 생물다양성이 들어있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공급망에서의 탄소배출인 스코프3의 감축을 시사하는 항목이 포함돼있다. 또 공시와 관련해 EU가 마련한 지속가능보고지침(CSRD)과 연계하도록 하는 내용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안이 담겨 있고 기업에 주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공급망 실사 대응은 이를 주관하는 산업통상자원부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 환경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한 몸을 이뤄서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울러 대기업이 ESG 역량이 부족한 협력업체를 실효성 있게 지원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이 마련됐으면 한다. 현재 공급망 실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걱정스러운 점이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페널티를 주는 방식의 공급망 실사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중기중앙회는 “ESG 평가 결과가 나쁜 협력사를 공급망에서 탈락시키는 생존 게임 방식의 공급망 실사는 산업기반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대기업 입장에서 ESG 경영이 지나치게 부진한 협력사를 안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ESG 경영의 초기 단계에 있는 국내 현실을 감안했을 때 협력사를 적극적으로 돕는 방식으로 ‘상생협력’이 진행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도 정책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유도를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금 지출이 수반되는 대기업의 협력사 지원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 부여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은 어떨까 싶다.
기업의 경우 모든 업종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접근보다는 업종별 대응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예컨대 의류 산업과 정유 산업은 실사 지침에서 주시하고 있는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는 분야와 방식이 크게 다르다. 업종별 특이성을 고려해 동종 업종끼리 함께 대응하는 게 적합한 이유이다. 이미 산업별 이니셔티브가 존재하는 자동차와 전자 등 업종은 이를 중심으로, 그렇지 않은 산업은 산업별 협의체 등이 중심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기업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이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실시간 협의 및 대응을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논의됐으면 한다.
그동안 ESG 논의가 진전되면서 ESG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영역은 결국 공급망이라는 점에 공감이 형성되고 있다. 중요한 점은 공급망에 초점을 맞춘 ‘ESG 렌즈’가 1차 협력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공급망의 심도(深度)를 어디까지로 할지 논의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2차, 3차 등으로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부에서 몰려오는 파고(波高)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이번 기회에 공급망 자체의 체질을 ESG를 중심으로 개선하기 위한 종합대책 수립 등 능동적인 자세가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만큼 ‘풀뿌리 공급망’의 ESG 혁신은 이제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