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남북 '强 대 强' 대치를 보는 다른 시선

2024-01-19 06:00
  • 글자크기 설정
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남북 간 ‘강 대 강’ 대치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작년 말 남북관계를 “동족이 아닌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라고 선언하고 북방한계선(NLL) 인근의 백령도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더니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선 한 발 더 나갔다. “대한민국을 제1의 주적으로 확고히 하고, 전쟁 시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해 공화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헌법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북은 남북대화와 협력을 담당하던 대남기구부터 모두 폐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김정은의 발언은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면서 “국민과 정부는 하나가 돼 북한 정권의 기만전술과 선전, 선동을 물리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북의 포격 도발에 대해서도 “우리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균열시키기 위한 정치 도발행위로, 북이 도발해온다면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통일부에 ‘북한 이탈주민의 날’ 제정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미국 미들베리 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는 11일 “김정은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선택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린 듯하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북의 움직임이 허세(bluster)가 아니라고 했다. “김씨 3대 세습왕조의 숙원이던 북·미관계 개선의 실패, 특히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로 인한 좌절감 탓이 크다”면서 “한반도 상황이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말했다.
 
“북, 對美 관계개선 포기하고 전쟁하기로”
 
이들은 “북이 북·미관계 개선을 포기함으로써 북의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bedrock policy shift)가 있었다”면서, 북은 중국‧러시아와의 협력 강화, 특히 군사적으로 러시아와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로벌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걸로 믿는다고 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작년 9월 푸틴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관계’로 전환해 나가기로 했고, 최근엔 최선희 외무상을 러시아에 보내 푸틴의 방북과 북-러 무기 거래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움직임들이 김정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다고 이들은 보았다.
 
홍형택 전 동아시아재단 사무국장은 “이 두 사람 모두 수십 년간 북한 문제를 다뤄온, 북한 전문가 서클에서 존경받는 시니어(senior)들로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차츰 풀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근래 들어 평양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핵문제의 산 증인이자 북·미 제네바 합의(1994년 10월)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조지타운대 명예교수)도 나섰다. 외교안보 전문지인 ‘내셔널 인터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북이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적다고 확신해선 안 된다”며 “올해 동북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 둬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북의 비핵화를 대북정책의 후순위, 또는 장기목표로 두고, 대북제재, 한미연합훈련, 북한인권 등의 논의를 통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선 관계개선, 후 북핵 해결 방안'이다.

文 전 대통령, 무엇이 부끄러운가?
 
이 대목에서 “결국은 또 그렇게 되는 구나”라며 씁쓸해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한·미 양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그런 기조 위에서 북핵문제에 대응해왔지만 결과는 북핵 용인으로 끝났다. 갈루치는 그 과정을 되풀이하라고 권한 셈이다. 그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지는 몰라도 앞으로 윤석열 정부는 물론 차기, 차차기 정부도 ‘북핵’ 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돌멩이 하나 제대로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 반성도 성찰도 없이 윤석열 정부가 “강경 대응한다”고 비판하고, “이대로 가면 전쟁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6일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어서 부끄럽다”고 했다. 뭐가 거꾸로 가고, 뭐가 부끄러운 것일까. 문 대통령은 윤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남북관계가 ‘강 대 강’ 대치 양상을 보이는 게 거꾸로 가는 거고, 부끄러운 일인 듯하다. 재임 중 대북 굴종외교로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북의 막말을 들어야 했고, 그런 수모 속에서도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실질적 진전은 이루지 못한 게 거꾸로 가는 거고 부끄러운 것 아닌가.
 
쏟아지는 ‘대화론’
 
‘강 대 강’ 국면에서 쏟아지는 건 대화론이다. 그러기에 진작 북과 대화를 했어야 한다는 거다. 그 기저에도 “윤석열 정부가 대화를 외면하고 강경일변도로 나갔기 때문에 상황이 악화됐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남북관계를 다룬 수많은 글도 다를 바 없다. 대화에 비판적이거나 미온적인 사람들은 ‘대결주의자’로 몰린다. 대화를 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북이 대화를 안 하겠다고 해서, 못하고 있는데도 대화를 안 한다고 비판한다.

대화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는 대화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이중 삼중으로 결합된 고차원 방정식처럼 어려운 대화다. 때로는 대화를 안 하는 게 훌륭한 대화일 수도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남북 대화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뭘까. 북이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보수, 어떻게든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야 작성이 풀리는 게 진보라고 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남북관계에서의 ‘대화’는 이미 그 의미가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대화를 안 하는 것도 훌륭한 대화”
 
한국 정치인들에게 북과의 대화만큼 좋은 정치적 소재는 없다. 대화하면서 북의 요구 조건을 적당히 들어주고, 쌀도 주고 비료도 주고, 그럴싸한 합의문,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합의문도 만들고, 이를 위해 평양에도 가고, 스스로도 통일 위업에 한 몸 불사르는 환상도 잠시 맛보고.... 정치인에게 이보다 좋은 ‘재료’가 있을까. 1980년대 초반부터 남북관계의 현장을 지켜본 필자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은 정치인으로 주저 없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1997년∽2000년)를 꼽는다.
 
필자는 종종 그에게 남북관계 이슈를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더 화려하게 플레이를 하라고 조언하곤 했다. 대화주의자임을 만방에 고하고, 평양도 가고, 남북문제에 대한 각종 성명, 예컨대 ‘이회창 독트린’ 같은 것도 만들어 발표하라고 했다. 이 총재는 듣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원칙 있는 대북정책, 곧 ‘유연한 상호주의’만을 고수했다.
 
당시 이 총재는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쥐고 있던, 한국정치를 끌고 가는 두개의 키, 곧 국내정치와 남북관계의 키 중 후자를 포기한 거였다. 권위주의 시절은 물론 민주화가 되고 난 후에도 국내정치와 남북관계의 두 키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정치적으로 활용한 영리한 정치인들이 많았던 데 비춰보면 대단한 용기였다.
 
“나는 쇼는 안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이던 2022년 1월 문재인 정권의 남북정상회담은 “정상외교가 아닌 쇼”라면서 “나는 쇼는 안 한다”고 선언했다. 평양서 미사일을 쏘면 1분 내로 수도권이 불바다가 되는데 만나서 앞으로 잘 해 봅시다 하는 건 정상외교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대통령에게 ‘강경 일변도’ 운운하면서, 남북관계가 ‘강 대 강’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는 데에 책임문제를 거론한 건 핀트가 안 맞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2019년 6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회동 때 어떻게든 그 회동에 끼고 싶어서 애쓴 표정이 역력한 문재인 전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마이크 폼페이오는 뒷날 자서전에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적인 이 사건의 일부가 되기를 요구했으나, 트럼프와 김정은 두 사람은 그가 동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대화’하면 1972년 박정희와 김일성 간에 이뤄진 7‧4 공동성명의 그 충격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남북대화의 상징성, 효용, 가치는 여전히 크지만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면서부터는 그것도 예전만 못해진 게 사실이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한다. 때가 되면 만난다. 만나게 돼 있다. 대화도 하고, 회담도 한다. 분단국 대통령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쯤은 대화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안다.
 
진보계열의 한 언론은 최근 북의 움직임이 “윤석열 정부의 강경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면서 “윤 대통령도 이를 강경보수 결집에 활용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