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카르텔 정치' 그냥 두고 한국정치 '전진' 없다

2023-11-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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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정치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상향식 공천과 하향식 공천 중 어떤 게 더 민주적인가.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상향식!”. 주민들이 경선으로 밑에서 후보를 뽑아 올리는 상향식이, 위에서 후보를 결정해 내리 꽂는 하향식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평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4지선다형으로 이 문제를 내고 답을 고르라면 답은 ‘상향식’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도 봐야 한다고 부연 설명한다. “상향식은 지역기반이 튼튼한 다선(多選)의원이나 평소 지역 대소사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경선의 민주적 취지는 인정하나 정치 신인들에겐 그만큼 불리한 게 현실이다. 정당이 ‘젊은 피’를 수혈해 정치의 세대교체도 이루고 당의 면모도 바꾸고 싶다면 이 점까지도 고민해야 한다.”
 
공천, 상향식 대 하향식
 
과거 김영삼(YS) 김대중(DJ)은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야(在野) 인사들 중 신망이 두텁고 능력 있는 인사들을 경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영입했다. 특히 YS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안상수 등을 과감히 끌어들여 당의 외연을 넓혔을 뿐 아니라 선거에서도 이겼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이명박 정권은 정치적 라이벌 박근혜로 하여금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게 하고 김종인 이상돈 이준석 등을 영입해 승리했다.
 
그럼에도 하향식 공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뿌리가 깊다. 권위주의 시절 이래로 공천 부조리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공천은 권력자가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수단 중의 하나였다. 후보 줄 세우기와 검은 돈 정치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공천비리는 지금도 ‘엘리트의 선순환’을 막는 대표적인 후진국병(病) 중의 하나다.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위원장 인요한)가 17일 ‘예외 없는 상향식 공천’을 4번째 혁신안으로 들고 나왔다. 혁신위는 “닫힌 국민의 마음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으로 상향식 공천을 통한 공정한 경쟁을 제시한다.”면서 “대통령실 출신 인사도 예외가 없다”고 못 박았다. 바른 방향이다. 공천 갈등이 선거 패배로 이어지곤 했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혁신위는 이에 앞서 중진의원들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를 제1호 혁신안으로 내놓았다. 파장이 자못 크다. 기대와 반발이 엇갈린다. 필자 생각으로는 혁신안 제시의 순서를 조금 바꿨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상향식 공천’과 제2호 혁신안(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의원수 10% 감축), 제3호 혁신안(서울강남과 영남권에 청년 공천)이 먼저 나오고 ‘험지 출마’의 중진용퇴 제안은 그 다음에 나왔어야 했다. 그게 당위와 전략, 두 차원에서 합리적인 순서였다.
 
“험지 출마 요청은 공무담임권 침해”
 
선거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혁신위가 중진들에게 직접적으로 불출마나 험지출마를 요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자칫하면 개인의 공무담임권(피선거권) 침해가 될 수도 있다. 선거는 본인이 출마할 지역구를 결정하고, 유권자들(국민)이 이를 추인하는 것이지, 당이나 정부기관이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물론 다른 선진국에서도 없는 일이다.
 
다선(多選)의 중진의원들은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한 유력 의원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고향에서 시작한 정치 고향에서 끝내겠다며 거부 의사를 명백히 한 의원도 있다. 혁신위 내부에선 “이럴 바에야 해체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한다. 그 사이 이준석 전 대표는 신당 창당을 선언했고, 이 정권의 ‘총아’라 할 한동훈 법무장관은 보수의 중심인 대구를 방문했다. 주말과 휴일, 국민의 관심은 한 장관 총선 출마론에 집중됐다. 인 위원장은 “경쟁력이 있는 분들이 와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당 안팎에선 원희롱 의원이 이재명 대표의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로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백가쟁명의 총선 국면 속에서 혁신위의 ‘험지 출마론’은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형국이다.

인 위원장은 YTN 라디오(15일)에 나와 윤심(尹心)을 거론하기도 했다. “한 열흘 전에 제가 여러 사람을 통해 대통령을 뵙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직접 연락이 온 것은 아니고, 돌아서 온 말씀이 ‘만남은 오해의 소지가 너무 크다. 그냥 지금 하는 것을 소신껏 끝까지, 거침없이 하라’는 신호가 왔다”고 밝혔다. 인 위원장으로서는 중진들을 압박하기 위해 대통령을 거론했겠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진 용퇴론’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필요
 
차제에 선거 때면 등장하는 ‘중진 용퇴론’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중진 용퇴론은 한국 정당체제 특유의 독과점구조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훈 교수(중앙대‧비교정치학)는 이 독과점구조를 ‘계승형 카르텔체제’로 규정하고, 이 카르텔체제로 인해 정치세력의 신규진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카르텔은 동종의 업자끼리 담합해 독과점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걸 말한다. 장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시대의 집권당인 민정당과 신민당에 의해 1987년 이래 숱한 분열과 통합을 거듭했지만, 줄곧 이들 두 정당의 분파, 후신 또는 통합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이행에 참여했던 민정당과 신민당 외에는 어느 정치세력의 신규 진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권위주의 세력과 제도권 야당은 선택과 온존을 통해 권위주의 시대의 계승정당들이 민주화 이후에도 정당정치를 독과점 지배할 수 있는 제도적 질서를 구축했다.” (장훈 <20년의 실험–한국정치개혁의 이론과 역사> 2010년)
 
장 교수는 카르텔 정당체제를 한국 정치의 폐쇄성과 후진성의 원인으로 본 것인데, 오늘날 우리 정치의 퇴행과 비효율이 모두 거기에 맞닿아 있다. 한동훈 법무장관은 최근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와의 일련의 설전 과정에서 “한국 정치를 수십년간 후지게 만들어 왔다”고 직격했다. ‘후지다’는 말은 품질과 성능이 다른 것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런 ‘후진 정치’ 역시 카르텔 정당정치의 산물이다. 일각에선 이미 ‘국민의 짐’이 되고 있음에도 한 세대가 넘도록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586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진입장벽 높이는 ‘카르텔 정당체제’
 

필자는 평소 이 카르텔 정당체제가 깨지기를 염원해왔다. ‘후진 정치’, 여야의 적대적 상호공생관계에 의존하는 카르텔 정치의 종언 없이는 우리 정치에 미래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단적인 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밀어붙이긴 했으나 이 제도로 위성정당이 속출하고 의원 꿔주기가 자행됐다. 그럼에도 여야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조차 않고 있다. 이대로 가면 5개월 남은 내년 총선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판이다.
 
카르텔 정당체제를 지탱하는 주요 동력 중의 하나가 ‘지역감정’임은 물론이다. 중진 험지 출마 요구는 그렇게 해서라도 지역감정을 해소 또는 완화시켜보자는 것일 게다. 특정지역에서 특정 당 인사들만이 당선되는 선거판을 바꿔보자는 거다. 지역감정에 관한 한 인 위원장은 할 말이 많다.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오래전 그의 친형(미국사람)이 장가를 가게 됐다. 신부는 부산여자였는데 신부 아버님이 신부에게 이러시더란다. 왜 하필 전라도 남자냐고. 그에겐 미국사람보다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게 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인 위원장은 한국 정치의 악성 카르텔 정당체제에 어떤 빚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고군분투를 이해한다. 물론 눈앞의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국민의힘 중진들의 용퇴 움직임은 전혀 없다. 오히려 민주당 측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재명 대표도 험지인 안동에서 출마하라”고 압박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이재명 대표도 험지(안동) 출마해야”
 
민주당의 이원욱 의원은 “이 대표 역시 우리 정치에서 대표적인 기득권자 중의 한 명”이라면서 “이 대표가 (안동을) 선택해준다면 (저도) 가라는 데 가겠다”고 했다. 김두관 의원도 “지도부에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내가 어떤 역할이라도 하겠다는 정도의 메시지가 나와야 인요한, 이준석 등과의 혁신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세계일보 11월 17일)
 
지금까지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용퇴’ 의사를 밝힌 사람은 박병석(전 국회의장 6선), 우상호(4선), 오영환(초선) 등 3명이다. 국민의힘은 대선 때 윤석열 당선인의 수행실장을 했던 이용 의원(초선 비례대표)만이 용퇴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이 모습까지도 카르텔 정당체제의 상호의존의 반영일까. 분명한 것은 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조차도 중진 험지 출마를 들이댄 인요한의 용기가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거라는 거다.

대표적 엘리트 순환론자인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는 엘리트는 순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한 사회, 한 국가의 엘리트도 부단히 교체, 순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레토의 말이다. “엘리트 순환의 목적은 구(舊)엘리트의 몰락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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