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남북 군사합의를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일시 효력 정지라도 시켜야 하나. 대북 문제가 또 한 번 시험대를 통과하고 있다. 정확한 판단과 대비, 현실적 대응이 긴요해 보인다.
국민의힘은 9‧19 합의로 대북 정찰과 감시가 취약해져서 파기든 효력 정지든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합의를 유지하는 게 안보 이익에 유리하다고 본다. 지난 12일 합동참모본부(합참) 국정감사에서도 양측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9‧19 합의는 위장 평화 공세였다”
김승겸 합참 의장은 “9‧19 합의로 대북 감시 범위가 축소됐느냐”는 질의에 “9‧19 합의로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돼있다”며 “이로 인해 북한 감시 범위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고 했다. 당시 북이 군사합의에 응한 배경은 "전형적인 위장 평화 공세였다"면서 “하마스 기습 침공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차이가 있다. 북한이 앞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이와 유사할 것이란 점에서 시사점이 많다”고 답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은 우리 군이 최전방 부대의 무인기 말고도 고고도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와 금강‧백두 같은 정찰기를 갖고 있어서 비행금지구역 밖에서 충분히 북한을 중첩 감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9‧19 합의로 공중감시정찰에 약간 제약되는 측면이 있겠지만 합의가 유지됨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지난달 19일 9‧19 군사합의 기념식에서 ‘합의’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9‧19는 남북 간에 사상 최초로 체결된 구체적인 군비 통제 합의로, 남북 간 군사 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이라는 것. “이 합의 덕분에 지난 정부 5년간 군사적 충돌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탄 난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했다.
文, ‘김여정 하명법’부터 사과해야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앞서 재임 중 ‘굴종 일변도’라고 비판받았던 자신의 대북 정책과 행태에 대해 유감 표명이라도 한마디하는 게 순서였다. 예컨대 끝내 위헌(違憲) 판정을 받은 대북 전단금지법(일명 김여정 하명법) 같은 어처구니없는 법을 밀어붙이고, 국민 혈세 170억원으로 지어준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가 북의 무단 폭파로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데 대해 사과했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탈북 선원 강제 북송과 해수부 공무원 월북몰이 논란은 또 어떻고. 그는 침묵했고, 자신의 대북 정책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이날 기념식이 퇴임 후 그가 참석한 첫 공식 행사였다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북 관계라는 게 회담하고 연설하고 악수하는 게 다가 아니다. 한때는 그런 외양(外樣) 자체가 소중했고 그게 ‘진전’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단계는 이미 지났다. 북이 핵 보유국이 되고 그로 인해 남북 관계의 본질이 바뀌고, 아울러 우리 내부에 그나마 존재했던 대북 컨센서스(합의)가 깨지면서 그렇게 됐다. 그 책임이 진보‧좌파진영의 오판, 독선, 무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 전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9‧19 합의는 우리 군사주권을 해체한 굴욕적 합의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NLL(북방한계선)이 85㎞ 대 50㎞로 우리에게 불리하게 설정돼 서북 5개 도서와 덕적도 고립, 수도권 안전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는 것이다. 비행금지구역(20∽40㎞) 설정으로 북한 전방부대 동향, 장사정포 감시와 근접 정밀타격이 불가능해져 자칫하면 전시(戰時) 연합작전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합의를 해준 장본인이 이제 와서 ‘나 때는···’ 운운하며 ‘남북 관계 파탄’을 걱정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하나.
군사훈련 규제, 신중했어야
북의 로켓·게릴라전 능력은 하마스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한다. 수도권을 겨냥한 북의 장사정포는 총 240문이고 여기에 170㎜ 자주포 140문(사거리 54㎞), 240㎜ 방사포 200문(사거리 65∽70㎞)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1시간에 1만6000발을 쏟아부울 수 있다. 비정규 특수작전군만 2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하마스처럼 레이더 회피가 가능한 글라이더를 비롯해 땅굴, 잠수함, 공기부양정, 헬기 등을 이용해 전후방 침투가 가능하다.
9‧19 합의는 군비 통제 관점에서도 허점투성이다. 군비 통제란 적대 당사자 간 투명성 제고를 통해 오판 가능성을 줄이고 긴장을 완화하는 게 요체다. 투명성은 물론 상호주의와 등가성 원칙이 핵심이다. 그럼에도 정찰활동 금지(1조 3항)로 인해 정찰력이 우수한 우리 측에만 불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윤식 여의도연구원 외교안보센터 실장은 “군사훈련 규제는 전투력 손실 등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함에도 2018년 11월 1일부터 각종 군사훈련을 중지시켰다”면서 “우리 측 활동이 제약받는 것에 비례해 북의 활동도 같은 규모로 규제해야 하는데 우리 측만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9‧19 합의는 남북 양쪽에 적용돼 우리만 양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서부 지역은 군사분계선 이북 북한 상공 20㎞까지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돼 북한 전투기의 접근을 사전에 경보‧조처할 수 있다는 것.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9‧19 합의 이전에도 한‧미 정찰기는 북한 대공미사일 사정거리 밖인 군사분계선 20㎞ 이남에서 비행했기 때문에 9‧19 합의로 북한의 도발 징후 감시가 허술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이 합의가 남북에 공평하게 적용돼 한국군의 전선 감시가 어려워진 만큼 북한군의 전시활동도 제약받고 있는데 이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서재정, 한겨레 10월 14일)
9‧19 판단과 대응 기준은 신뢰
어느 설명에 더 적실성(適實性)이 있을까. 군사적으로 끊임없이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우리에겐 판단에 필요한 강력한 준거의 틀이 이미 존재한다. 그건 신뢰다. 북한을 믿을 수 있느냐다. 믿을 수 있다면 비행금지구역 설정이나 감시, 정찰 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은 지난 75년 동안 신뢰할 수 있는 상대로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남침 도발을 위해 몰래 땅굴까지 판 북한이 아닌가. 그렇다면 9‧19 합의가 언제든 우리의 정찰, 감시, 방어태세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대응해야 한다.
북의 9.19 합의 위반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공식 위반 횟수만 17차례에 달한다.(2022년 12월 31일 기준) 대표적인 예만 보자. 2019년 11월 23일에는 NLL 인근 창린도에서 김정은 지휘로 완충수역에 포사격을 했고, 2020년 5월에는 중부전선 우리 군 3사단 GP에 고사총을 쏘았다. 2022년 12월엔 소형무인기 5대를 MDL 이남으로 침투시켰다. 핵능력 고도화와 시도 때도 없이 쏘아댄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다. 2022년 9월에는 핵 무력에 의한 통일을 공언하고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했다. 모두가 명백한 ‘합의’ 위반이고 도발이다. 이런 북 앞에서 비행금지구역 유불리를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칫하면 또 ‘전쟁세력’으로 몰린다
신원식 신임 국방부 장관은 “한국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북의) 위협에 놓여 있다”면서 “9‧19 합의로 북 도발 징후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최대한 신속히 ‘합의’에 대한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바른 대응이라고 본다.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 남북 합의서 효력을 일부 정지할 수 있도록 돼 있다.(제23조 2항)
다만, 그렇다고 곧바로 효력 정지나 합의 파기로 가는 것은 현책이 아니다. 이를 도발의 구실로 삼으려는 북의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지만 그보다는 윤석열 정부를 예의 ‘전쟁세력’으로 몰아갈 좌파의 거센 공세가 불을 보듯 뻔해서다. 자칫하면 또 반평화세력으로 몰려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평화 생색은 좌파가 내고 책임과 뒤처리는 보수우파가 맡는 게 대북 정책의 생태계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는 ‘효력 정지’란 말조차도 가능하면 안 썼으면 한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국민의힘 정부는 다시 ‘전쟁세력’이 되고 민주당은 ‘평화세력’이 된다. “평화 싫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9.19 합의는 이미 사문화됐다. 그냥 내버려둬도 된다. 남북 관계의 창고를 뒤져보면 지난 70여 년간 북이 지키지 않아 휴지가 된 약속, 합의 문서들로 차고도 넘친다. 우리는 그런 문서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