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 논쟁도 재연되는 느낌이다. 가치외교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중국은 지난달 21일 미국 마이크론사의 반도체에 대해 보안심사 불합격을 이유로 구매 중단조치를 내렸다. 작년 10월 미국이 삼성, SK하이닉스 등 외국 기업들의 첨단 반도체장비 대(對) 중국 수출을 통제하겠다고 한 데 대한 보복 성격이 짙다. 이에 미국은 마이크론사 제재로 초래될 중국의 반도체 부족량을 한국 기업들이 메워주지 말라고 요청(압박)하고 나섰다.
세계 반도체시장은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가 장악하고 있다. D램을 기준으로 시장 점유율은 삼성 43%, SK하이닉스 35%, 마이크론 15%다. 마이크론이 중국시장에서 퇴출되면 중국은 반도체 공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은 그 공백을 한국기업들이 나서서 메꾸지 말라는 것이다. 한미 동맹관계에 비춰 우리로선 미국의 이런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우나,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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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의 반도체 부족분 메우지 말라”
미국은 작년 10월 외국 기업들이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중국에 들일 경우 미 상무부의 별도 허가(수출통제 면제조치)를 받도록 하면서도,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이를 1년 간 유예해줬다. 유예기간은 오는 10월로 끝난다. 미국이 다시 유예해줄 것인가? VOA(미국의 소리 방송)은 지난달 23일 “한-미 간 지속적인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걸로 관측된다.”고 보도했다. 재(再)유예 여부가 반도체 전쟁의 한 고비가 될 판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미국의 기술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과 이를 어떻게든 막거나 늦춰보려는 미국 간 싸움이다. 거기에다 2024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의 국내정치적 계산까지 더해져 더 첨예한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달 27일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4개국이 디트로이트에 모여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공급망 협정을 타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로선 ‘재유예’를 받고, 향후 예상되는 장애까지도 제거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 겉으로 드러난 논의나 움직임은 없다. 미국의 일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탈동조화(decoupling‧관계단절)에서 디리스킹(de-risking), 곧 ‘위험 줄이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긴 하다.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달 21일 G7 정상회의 폐막 후 “미중관계가 조만간 해빙(thaw)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미 하원의 외교위원장 마이클 매콜과 미-중 전략경쟁특위 마이크 갤러거 위원장은 2일 미 상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 공백을 메우게 하지마라고 거듭 촉구했다. 공화당의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인 두 사람은 “우리는 미국의 동맹들과 함께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단호히 반격해야 할 때”라면서 이같이 촉구했다. 이들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받고 있는 ‘수출통제 유예조치’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두 기업이 예외(유예)를 적용받는 것은 중국 정부에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한국과의 동맹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美 안보와 경제에 기여, 代價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기업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나 글로벌 사업을 하니 양쪽을 감안해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ZDNet Korea 5월25일) 하지만 이제라도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 사정이 그만큼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우리의 무역수지는 21억 달러 적자였다. 벌써 15개월째다.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 수출 부진 탓이 결정적이다. 반도체 수출액은 작년 같은 달보다 36.2%나 줄었고, 수출 증가율은 10개월째 마이너스다. 무엇보다 중국을 대체할만한 시장을 못 찾고 있는 게 문제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가 움직일 공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는 안보와 동맹은 물론 경제와 산업의 관점에서도 한미관계 개선에 나름 최선을 다했고 바이든 행정부도 그 덕을 봤기 때문이다. 윤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아‧태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항행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바이든 정부의 동아시아전략 유지에 크게 도움을 줬다.
특히 한일관계 정상화는 미국의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던 동북아에서의 안보우려를 크게 덜어준 것이었다. 윤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배상문제로 경색됐던 한일관계를 정상화했을 때 “최대의 수혜자는 바이든”이라는 말도 나왔다. 2022년 한미정상회담 때는 삼성 현대 등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이 앞을 다퉈 미국에 대규모 공장건설과 투자를 약속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윤 대통령은 “미국에 편중됐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문재인 정권 때 왼쪽으로 흘렀던 외교의 錘(추)가 오른 쪽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지적이긴 했다. 문제는 ‘대미 편중’이 ‘가치외교’란 개념과 연결되면서 윤 정부의 외교가 ‘가치외교’로 규정되고, 야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과도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외교’ 공격, 초점이 안 맞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4월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가치외교, 멋있게 보일지는 모르지만…’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윤 대통령이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날이었다. 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경쟁하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의 외교는 철저하게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여야 한다. 한쪽에 기대고 다른 쪽과 적대하면 경제는 폭망, 안보는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갈 위험이 크다. 친구가 아니면 적(敵)이라는 이분법으로 외교전에 나서서는 안 된다. 국익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 대표의 이런 주장은 지나친 감이 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를 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채 살아왔기에 편중 외교의 위험성과 한계를 본능적으로 안다. 비록 미국과 소련의 양극적 냉전체제 아래서 미국 중심의 진영에 속하긴 했어도, 기회가 오자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북방정책을 통해 외교의 지평을 넓힌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 외교관들에게 “당신은 친구가 아니면 적(敵)이라는 이분법으로 외교전에 나선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웃을 것이다. 어떤 외교관도, 그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관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가치외교’라면 그것은 이재명 대표가 말한 다분히 상식적인 것들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서 국익은 물론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한 단계 높은 외교를 하자는 것일 게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맞게 우리 외교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왔다. 물론 그렇다고 윤 대통령이 외교를 잘하고 있느냐는 별개다. 가치외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우리가 어떤 실익(實益)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백번 옳다. 그러나 적어도 ‘가치외교’를 경직되고 교조적인 ‘이념외교’ 쯤으로 치환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논쟁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나 방법이 항상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한-중-일, 한-미-일 협의체 활용하라
‘가치외교’는 굳이 그 연원을 따지자면 국제정치학에서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의 경합에 닿아있다. 크게 보면 ‘가치외교’는 이상주의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전후(戰後)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결, 곧 1차 대논쟁은 이상주의의 패배로 귀결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진영(陣營)을 막론하고 전후 외교의 영역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은 모두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외교였다. 윤 정부가 이점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보편적 이상과 규범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한 것은 바른 방향이다.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국력과 리더십이 있느냐가 문제이지 그 자체가 부정되고 비판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얘기가 옆으로 흘렀지만 우리로선 어떻게든 ‘수출통제 면제’ 재유예를 받아야 한다.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부처는 물론 민간단체들까지도 나서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반도체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데 있다. 그게 관련국들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도해야 할 일이나 대선 때문에 어렵다면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한다.
필자는 반도체 강국, 한국의 대통령이 그 일을 했으면 한다. 다자적 국제 논의구조를 만들자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올해 한국이 한-중-일 3국 협력체 의장국이다. 여기에다 지난해 한 미 일 3국 정상이 구성키로 합의한 한-미-일 3국 협의체를 붙인다면 논의에 탄력이 붙을 수도 있다. ‘대미 편중’ 논란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외교’의 힘을 보여줄 때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