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뿌리'부터 시작해 우리 역사 격동의 현장을 몸소 겪은 이종찬 광복회장은 현 정치권에 대해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사회 존경할 만한 국가 원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회장의 쓴소리는 가슴 깊게 파고든다. 그는 협치가 사라진 여야, 대화가 끊긴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 거대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를 현 정치권의 가장 큰 병폐로 지목했다.
이 회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한솥밥을 나누며 자랐다. 이 회장은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쭉 서울에서 살았다.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해 장교로 복무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서 근무했다.
제11~14대 국회까지 내리 당선되며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민주자유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경쟁하며 대한민국의 정치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장관 탄핵 다반사…현 국회, 군사정권 당시보다도 못해"
이 회장은 본지와의 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정의와 공정, 그리고 법치주의를 강조했다"며 "또 연금·교육·노동개혁을 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하나 이행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이 회장은 "그런 뜻에서 21대 국회는 실패한 국회"라고 질타했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채택되지 않은 인사를 임명한 예가 18건에 이르고, 대법원장 임명동의안마저 부결됐다"고 근거를 들었다. 그러면서 "장관 탄핵이 다반사고, 입법한 법률안이 대통령 거부권으로 인해 국회로 되돌아가길 반복하고 있다"며 "여야를 막론하고 강경파를 국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처음 국회의원이 된 제11대 국회에선 거대 여당과 난쟁이 야당의 형국이었다"며 "그럼에도 불구, 당시 여당은 단독으로 입법하지 않고 야당의 소리를 경청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안의 거수기로 전락한 현 국회도 강렬하게 꾸짖었다. 이 회장은 "과거 정부와 여당 강경파들이 '학원안정법'이라는 반민주적인 법안을 냈을 때 나는 야당의 소리를 듣고 국회 입법 과정에서 제동을 걸었다"고 회고했다.
학원안정법은 1985년 전두환 정권 당시 학생 운동을 막기 위해 시도했다가 무산된 법안이다. 운동권 학생들을 영장 없이 바로 구속·체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회장은 "그로 인해 원내총무직에서 해임됐으나 학원안정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며 "국회의원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국민의 대표다. 당의 지시가 있어도 국민의 대표는 이를 걸러낼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군사정권 아래의 위축된 국회에서도 우리는 여야가 대화로서 국민의 뜻을 반영했다"며 "민주화 세상이라는 지금 국회는 제 기능을 군사정권의 반도 못하고 있다. 역사와 국민에게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北에 도발 빌미 주면 안돼…이념 논쟁, 이미 끝난 것"
이 회장은 윤석열 정부가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9·19 군사합의 자체는 북한에 지나치게 유리한 '졸렬한 합의'였지만 지난 정부와 북한 간의 합의였기에 윤 정부가 먼저 나서서 파기를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그는 "지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더라도 합의한 이후에는 이를 보완할 책임은 현 정부에 있다"며 "지금처럼 국방부 장관이 합의한 것을 파기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짚었다.
이어 "북한은 쉽게 합의를 깨고 약속을 어겼던 사례가 빈번하다"면서도 "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합의한 것을 파기한 전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는 정전 규칙을 지켰고 남북한 간 합의된 바를 지켰다"고 합의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이 회장은 "우리가 북한에게 도발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북에서 먼저 우리에게 불합리한 합의의 파기를 요구하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정부 여당의 '이념 논쟁'과 관련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17.15% 차이로 참패한 10·11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였다.
이 회장은 "보궐선거 패배 이후 정부 여당도 이념 논쟁이 국민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며 "우리의 강점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는 우월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지금 우리 국력의 50분에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국력 격차만 보더라도 이념 논쟁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