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영의 재팬플래시] 윤석열ㆍ기시다 콤비, 독일과 폴란드를 보라

2023-05-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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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전 뉴시스 도쿄특파원·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



현재 한·일 관계 정상화 작업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역사상 양국 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사건으로는 1965년 한·일 수교와 1998년의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수교 협정은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며 기나긴 협상 끝에 성사되었고 김대중·오부치 선언도 양국 간에 사전 조율을 거쳐 선언 형태로 나왔다.
그러나 지금 한·일 관계는 윤석열 대통령이 거의 일방적으로 그리고 단독 플레이처럼 주도하고 있고, 여기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따라오면서 어느 정도 호응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한·일 관계는 양국 모두 국내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만큼 어느 쪽이나 정부 차원에서 섬세한 검토를 거쳐 신중하게 다루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과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보일 만큼 뚝심 있게 그리고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 내 신중론마저 단호하게 물리쳤다는 것이 최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교체 배경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을 대신해 우리 정부가 배상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식을 놓고는 “일본에 완승을 갖다 바쳤다”는 반발도 나오지만 윤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 윤 대통령에 대해 일본은 어떤 생각이고 어떤 반응일까. 윤 대통령 방일 후 두 달 만에 기시다 총리가 한국으로 날아온 것 자체가 모든 걸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상 간 셔틀 외교가 실무적인 성격을 갖는다 하더라도 긴급 돌발 상황도 아닌데 두 달 만에 양국 정상이 오가는 것을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당초 기시다 총리 방한은 이르면 올해 여름쯤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윤 대통령이 오는 5월 19일 히로시마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면 올해 두 번씩 방일하는 것이 되어서 일본도 답방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우리 정부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윤 대통령이 지난 4월 24일 미국 방문에 나서기 전에 기시다 총리 방한을 타진했다고 한다. 물론 일본으로서는 한·미·일 협력 강화나 G7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 등을 생각하면 기시다 총리 조기 방한이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보다 윤 대통령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마음의 빚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본 정계 소식통들의 한결같은 관측이다.
윤 대통령은 방일 이후 국내에서 많은 비판도 받고 지지율도 떨어졌다. 그러나 기시다 내각은 반대로 지지율이 최대 7% 상승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기시다 총리는 측근들에게 윤 대통령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에게 호감을 느꼈고 신뢰가 간다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 기시다 총리의 한국행 발걸음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나흘 앞두고 지난 3일 준비차 서울을 찾은 아키바 다케오(秋葉剛男)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한국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격)은 조태용 국가안보실장한테서 기시다 총리 방한 시 윤 대통령의 조치에 상응하는 ‘호응 조치’를 바라는 한국 내 여론을 가감 없이 전달받았다.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 해법에 맞춰 기시다 총리가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해야 한다는 요구였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윤 대통령은 아키바 국장을 만난 자리에서 “기시다 총리에게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관계 개선을 주도한 윤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을 높이 평가하며 이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번 답방을 결심하게 됐다”는 기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뒤였다.
특히 기시다 총리 마음을 크게 움직인 윤 대통령의 ‘용기’는 미국 방문 전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한 내용이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유럽은 지난 100년 동안 수차례 전쟁을 경험하고도 전쟁 당사국끼리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면서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거나,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야당 측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논란을 일으킨 발언이었지만 기시다 총리와 일본 지도자들에겐 거꾸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로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뇌리를 스친 것은 독일 나치 정권의 피해자였던 폴란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보인 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2차 대전 후 독일이 피해국들에 기회 있을 때마다 사죄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이를 일본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국이었던 폴란드가 어떤 태도를 보였으며 이것이 독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과문하기 일쑤다.
2차 대전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은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많은 독일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없는 것이 독일에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인들은 스스로 히틀러의 희생자였다는 의식이 강했다. 패전 이후 나치가 점령했던 폴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독일인 1200만명이 추방되었고 귀환 과정에서 어린이 800명을 포함해 6000명 이상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치인들이 폴란드에 사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국경 문제를 비롯해 여러 문제로 양국은 갈등하고 있었다.
종전 20주년 해인 1965년 11월 18일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 35명이 서명한 편지 한 통이 서독 가톨릭교회 주교단에 도착했다. 편지 끝부분에는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고 적혀 있었다. 전후 독일 피란민들이 폴란드에서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폴란드가 독일로 인해 입은 피해와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2차 대전 중에 폴란드인 6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폴란드 전체 인구 중 5분의 1에 해당한다. 아우슈비츠 등 폴란드 곳곳에 세워진 집단 수용소에서는 폴란드계 유대인 200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수많은 폴란드군 포로와 민간인들이 곳곳에서 고문당하거나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그럼에도 피해국인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가해자인 독일 교회에 먼저 ‘용서를 베풀며’ 더구나 ‘용서를 구한’ 것이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서독 교회 측 답변이 어정쩡한 변명으로 돌아오자 폴란드 집권 공산당은 자국 가톨릭교회를 “서독 제국주의자들에게 조국의 민족적 이익을 팔아넘긴 반민족적 매국노”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서독에 대한 항복문서”라거나 “나치의 후신”이라는 비난과 함께 편지 작성을 주도한 스테파노 비신스키 추기경을 추방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공산당은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는 당시까지 수교마저 맺지 못하고 적대적이던 폴란드와 서독 간에 대화와 화해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겨울비가 내리는 바르샤바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라는 평가를 받은 그 역사적 장면이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에 과거사에 대해 “가슴 아프다”는 말로 넘어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12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 해결’에 합의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전 위안부분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일본 총리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무수한 고통을 겪으며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 발언 중 “가슴이 아프다”만 답습하고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표현은 생략했다. 위안부 합의 당시 외무상으로서 합의문을 발표한 당사자였던 기시다로서는 이후 그 합의가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법하다. 그나마 ‘가슴 아프다’는 말 정도도 일본 내 보수층 반발을 각오하면서까지 기시다 본인이 내린 결심이라고 하니 애처롭다는 생각까지 든다.
윤 대통령이 일본에 무릎 꿇게 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윤 대통령 퇴진 운동에 돌입했다. 분노의 눈을 부릅뜬 한국 신부들 얼굴 위로 60여 년 전 용서를 이야기하던 폴란드 신부들 모습이 스쳐 간다. 한국이 굳이 사죄를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릎 꿇는, 그래서 일본 전체를 일으켜 세우는 일본 지도자의 등장도 요원할 것이다. 그나마 윤석열·기시다 두 사람의 용기와 서로에 대한 호감이 한·일 관계에 새로운 장을 조금씩이라도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미니박스]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 역사
 
원래 셔틀 외교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국 사이를 제3자 또는 제3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는 외교 방식을 의미하는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재했던 것이 시초였다. 이후 셔틀 외교는 외교 현안들을 수시로 협의하기 위해 정상 등이 양국을 오가면서 하는 외교 방식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1년에 한 번씩 상대 나라를 오가면서 정례 정상회담을 열자고 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가 2008년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 때 재개됐다. 하지만 역사 문제 등으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중단됐다가 이번에 12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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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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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비어천가 지리네
    저런게 특파원이고, 박사라니 참 한심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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