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의 새해가 밝자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겠다는 대국민 선언을 했다. 국민적인 저항이 이어지면서 정계와 나라의 분열상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3월에 이르러 정부가 한·일회담의 조속한 진행을 재확인하자 8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야당은 물론 종교·사회·문화단체의 대표와 재야인사 등 200여 명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대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서울은 물론 부산, 목포, 광주, 대구 등에서 집회를 열고 한·일회담 과정에서 보여준 박정희 정부의 굴욕적인 저자세와 일본에 의존적인 태도, 그리고 국민 참여를 배제한 외교 거래 등을 비난했다.
대학생 시위는 4·19 기념일을 기점으로 가열되기 시작해 5월 20일에는 박 정권이 내세운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 열렸다. 5월 25일에는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했고 30일에는 서울대에서 경찰의 대학 난입과 학생 및 교수 구타행위를 규탄하는 단식농성이 벌어졌다.
이런 엄청난 국가적 혼란과 진통을 겪으면서도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인 1965년에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매듭짓고 양국관계를 뚫었다. 조약 체결과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야당과 학생, 시민들의 반대는 거셌지만, 정부는 강경 돌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 생명을 걸어가며 왜 그토록 한·일회담에 집착했는지, 또 당시의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후 대한민국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여기서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다음의 일화는 60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박 대통령의 의지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듯해 소개하고자 한다.
박정희는 1965년 6월 자신의 제자이자 군대 부하였던 박태준을 불러 말했다. “나는 고속도로를 맡아 직접 감독을 할 것이니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주게. 고속도로가 뚫리고 제철소가 준공되면 우리가 바라던 공업 국가의 꿈이 실현되는 거야” 그리고는 김학렬 부총리를 불러 “국가의 운명이 걸린 포항제철을 위해 영혼까지 불사르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1963년 12월에는 주미대사이던 정일권을 외무장관에 임명하고는 청와대에 불러 생태찌개에 소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정형(정일권은 박정희의 군 선배였다), 우리 힘을 합쳐서 이 민족을 한번 살려 봅시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전념해 주십시오. 나도 이승만 못지않게 일본을 싫어합니다. 과거사만 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지요. 하지만 경제부흥, 민족중흥에 끌어다 쓸 돈이 당장은 대일청구권 자금밖에 없으니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내키지 않지만, 원수의 돈을 끌어서라도 우리 굶주리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나에게 욕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당장 권력을 내던지고 물러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역사적 과업은 완수해야 한다. 훗날 내가 해놓은 일에 잘못이 있다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나는 달게 받을 것이다” (단행본 <박정희의 옆얼굴>에서 발췌)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 임했던 각오를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회담을 전후해 윤 대통령이 ‘국익 우선’과 ‘한·일 관계의 미래’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데서 박정희의 그림자를 얼핏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회담 이후 야당과 여론의 거센 공세에도 꿋꿋이 버티는 모습에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결기가 배어나는 느낌도 든다.
대통령실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윤 대통령의 이번 방일 목적은 일본 달래기라고 한다. 윤 대통령은 올해 초부터 방일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했고, 대통령실의 국가안보실과 외교부 등은 성급한 추진은 국내에 역풍이 불어올 수 있다며 우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계속 밀어붙였고 국가안보실 1차장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최근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물러난 것을 놓고 대일외교 추진의 온건론과 급진론이 부닥친 결과라는 관측도 나오는 이유이다.
역사의 시계를 다시 앞으로 돌려보자. 김대중 대통령은 ‘6·3사태’ 당시 야당 의원으로서 한·일회담을 지지하는 바람에 ‘왕사꾸라’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일본을 방문할 무렵 양국관계는 한국의 IMF 사태 당시 일본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냉랭할 때였다. 그러나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한·일 관계는 새로운 돌파구를 맞게 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 두 나라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를 맞이했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일본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일·한 국교 정상회담 당시 국회에서 다수 의원들이 정상화에 반대하는 가운데 용기를 가지고 정상화에 찬성했으며 양국 국민 차원의 친선과 이해의 필요성을 호소했다”고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역사적 결단에 대한 언급 없이 현재와 미래의 일·한 관계를 말할 수 없다”고 화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정책, 일본과의 개인적 인연 등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흔히 통용되는 ‘친일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친일의 비난이 그리 가혹하게 가해지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진보적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는 ‘친일 콤플렉스’, 진보는 ‘친북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보수 정권이 일본에 유화적이면 진보세력으로부터 곧바로 ‘친일’의 딱지가, 진보 정권이 북한에 유화적이면 보수세력으로부터 곧바로 ‘친북’의 딱지가 붙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보 정권이 일본에 유화적이거나, 보수 정권이 북한에 유화적이면 이런 낙인이 덜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친일의 비난은 덜 받았지만, 대북 햇볕정책으로 ‘친북’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사실이 대표적이다.
여권에서는 윤 대통령의 이번 한·일 문제 해법이 문재인 정부가 방치를 해온 양국 간 현안을 책임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2018년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은 ‘사법 자제의 원칙’을 어기고 한·일 간 국교 수립의 전제를 부정하면서 외교를 책임진 역대 정부의 일관된 입장에 배치되는 것인데도 문재인 정권은 이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번 한·일 관계 해법은, 과거사를 청산하고 미래지향적 양국관계로 나아가자고 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청구권의 재검토를 통해 일본에 청구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을 한 노무현 정부의 한·일 관계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선 진보 정권이 지켜온 정신을 문재인 진보 정권은 방치를 하고, 윤석열 보수 정권이 이어받는 묘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일본 측에서는 속으로 무슨 생각과 평가를 하고 있을까. 필자가 일본 정계와 외교가, 언론계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대개 이런 내용이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이번 회담 결과에 기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이 양보한 것 없이 한국에 다 얻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이 보여준 결단에 일본도 적어도 비슷한 정도의 답례를 해야 하고, 안 그러면 일본 외교 수준에 대한 평가도 떨어질 것이라고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9월 방한이 거론된다. 그동안 일본이 한국에 보여주었던 통 큰 외교가 사라진 것 같아 씁쓰레하다. 그리고 오므라이스 식사는, 한국 측에서 소박한 곳에서 조촐하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요청을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은 소홀한 대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긴자의 고급 스키야키 집으로 갔고, 2차로 윤 대통령의 추억이 있는 오므라이스 집으로 한 것이다”
“이번 회담은 윤 대통령이 통 크게 형님 외교를 했고, 기시다 총리는 딱 줄 것만 주는 짠돌이 외교를 했다. 특히 일본이 기자회견에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제일 짠돌이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은 윤 대통령이 많은 양보를 한 것처럼 보여서 한국에서 비판도 많고 방일 후 지지율도 떨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짠돌이 외교를 한 일본이 후에 비싸게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시다 내각은 윤 대통령의 방일 이후 지지율이 최대 7% 상승했다. 윤 대통령이 오는 5월 히로시마에서 개최되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면 올해 두 번이나 방일한 것이 되어서 일본도 답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졌다. 일본도 행동을 하라는 미국의 압력도 점차 더 커질 것이다. 외국은 이번에 한국이 통 큰 외교를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일 관계야말로 역사와 국제성, 곧 시간과 공간이 얽히는 복잡한 방정식이고, 그런 만큼 뚜렷한 방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박정희, 김대중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미니박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관한 제 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인 1965년 6월 23일에 ‘한·일회담 타결에 대한 대통령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회담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