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 감독의 뛰어난 통찰은 오늘날에도 증명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연출 안길호)의 글로벌 흥행과 극 중 악역 '박연진'이 온·오프라인을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글로리'의 흥행은 예상했어요. 워낙 훌륭한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박연진'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지독한 악역이잖아요. 미움을 받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다.
임지연은 극 중 '동은'을 지옥으로 몰아간 학교 폭력의 주동자 '박연진' 역을 연기했다. 임지연의 첫 '악역'이기도 했다.
"김은희 작가님께서 제가 '천사의 얼굴에 악마의 심장을 가진 박연진 캐릭터 소개 글과 부합했다'고 하셨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악역을 해보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그렇다면 내가 망쳐보겠다'고 하셨어요. 하하하. 작가님께서 제 가능성을 봐주신 것 같아요.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죠."
'더 글로리'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파트1은 물론 파트2도 공개 직후 글로벌 시청 1위를 기록하며 '더 글로리' 신드롬을 일으켰다.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뿐만 아니라 영어와 비영어, TV와 영화 부문을 통틀어 전체 1위에 올라섰고 대한민국을 비롯한 23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도합 79개 국가 톱10에 이름을 올린 대기록이다.
"국내에서도 이런 큰 사랑을 받아본 게 처음인데···. 해외 팬들 반응도 신기해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워가 늘어나는 걸 보면 진짜 놀랍더라고요. 우리나라 콘텐츠를 사랑해주시는 게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요. 좋은 작품을 만났다는 게 정말 감사해요."
'연진'은 '동은'의 복수가 시작되고 그동안 당연하게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돈과 권력, 가족까지 잃을 위기가 닥쳐와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강력한 악인이다. 임지연은 "처음 맡은 악역인 만큼 최선을 다해 연기하려고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맡은 악역이고 또 최고의 악역이잖아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죠. 회사 동료들과 선배님들께도 상의하고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했어요. '연진'을 두고 다양하게 생각해보았던 것 같아요. 소시오패스적인 면모를 강조할까, 감정을 다 쏟아볼까 하다가 '나만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 빠지더라고요. 나만 할 수 있는 것,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빌런···.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임지연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는 김은숙 작가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를 미워하게 해 달라"며 '연진'을 최고의 악역으로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제 캐릭터가 대중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모두를 공감하게 만드는 건 힘든 일이에요. 반대로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일도 쉽지 않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날 싫어하게 만드는 일도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청자들이 모두 '연진'을 미워하고 단 한순간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다짐하고 시작한 작품이고 모든 순간 그렇게 임했어요."
촬영을 앞두고 임지연은 고민에 빠졌다. 외모, 권력, 돈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면서도 친구들을 괴롭혀왔던 '연진'을 이해하기 힘들어서였다.
"여러 생각을 했어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거나, 환경 때문이라거나···. 다양하게 접근해보고 캐릭터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마음에 딱 꽂히는 게 없더라고요. 대본을 꼼꼼히 다시 읽어보았고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누가 그렇게 태어나래?'라는 대사를 보고 번뜩 정신이 들었어요. '연진'이 어떤 이유로 성격이 바뀌었다거나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연진은 그냥, 그런 애예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모든 게 수월해지더라고요."
처음 맡아 본 '악역'은 연기적으로도 신선한 재미를 주었다.
"욕을 스스럼 없이 하는 캐릭터라서 재밌었어요. 하하하. 또 '연진'은 상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캐릭터라 입체적인 느낌이 들어서 연기할 때도 흥미로웠죠."
임지연은 '동은' 역을 연기한 송혜교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송혜교와 함께한 촬영 현장을 떠올리며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송)혜교 언니에게 정말 고마워요. 함께 촬영할 때마다 '많이 준비했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식으로 (연기를) 맞춰주셨어요. 첫 촬영부터 쉽지 않았는데 제가 마음껏 할 수 있게끔 열어주었고 잘 받아주셨어요. 제가 감정이 북받쳐서 언니의 멱살을 세게 쥐거나 거칠게 대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흐트러지지 않고 잘 받아주셨어요. 제 행동이 상대 배우에게 실례일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언니를 통해 배우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배웠어요."
데뷔작인 영화 '인간중독'부터 '간신' '럭키', 드라마 '불어라 미풍아' '상류사회' 등에 이르기까지 청순하거나 고혹적인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임지연은 최근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을 시작으로 '장미맨션'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2' 등으로 전작과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근 선택한 작품들과 캐릭터의 변화에 관해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작품을 고를 때 선을 두지 않아요. '내가 이런 걸 잘하니까 이런 걸 해 보자'라는 마음은 일찍이 다 버렸어요. 나를 대입해 보았을 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배역들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아요. '종이의 집'과 '장미맨션'이 딱 그런 작품이었죠.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요. 시청자들도 작품마다 '쟤가 임지연이었어?'라고 놀라시면 좋겠고요. 한계점을 두지 않는 게 제 목표예요."
'더 글로리'와 '연진'이 뜨거운 인기를 얻은 만큼 임지연의 차기작에도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는 올해 tvN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과 SBS 드라마 '국민 사형투표'로 시청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크게 부담을 느끼지는 않아요. 특히 '연진' 이상으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어요. 하던 대로 제 배역을 충실히 하다 보면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설렘만 있죠. 이번 작품을 하고서 '아, 내가 칭찬받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 연기를 했던 게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해 했던 일이라는 걸요. 작품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