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감독의 언어가 그렇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뉘앙스로 넌지시 그려진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부터 '경성학교' '독전' 등에 이르기까지 비유와 은유로서 이야기를 전달해왔다.
영화 '유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치열한 삶과 투쟁 그리고 희생을 단순한 숭고함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투쟁을 자신만의 언어로 담아냈고 여기저기 산재하여있는 은유와 비유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뉘앙스와 영화적인 비주얼로 전달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매개가 '미장센'이 된 거죠.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고요. 전작인 '독전'은 스타일리쉬함을 표방한 작품이었고 캐릭터만큼이나 (스타일리쉬함이) 중요했다면 '유령'은 조금 달랐어요. 미장센이 수단이었죠. 그때(1933년 경성)의 공기가 얼마나 찬란했고 아름다운 투쟁을 했었던지를 보여주는 매개로요."
영화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과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이 의심을 뚫고 외딴 호텔을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담고 있다. 마이지아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밀실 추리극에 더욱 충실한 작품이죠. '유령이 누구인가'가 중요했어요. 원작을 영화화하는데 한 달 정도 고민해보았는데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결국 제작사 대표님께 '못하겠다'라고 했어요. 거절하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왜 이 작품이 자신 없었을까?' 싶더라고요. 한걸음 떨어져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추리극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추리를 배제하고 '유령'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흥미로워졌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자신이 생기더라고요."
이해영 감독은 추리극 아닌 스파이 장르로 골조를 수정했다. 제작사 더 램프의 대표에게 "새롭게 시놉시스를 구상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내비쳤고 원작과 다른 이야기로 수정해나갔다.
영화 '유령' 속 독립운동가들과 항일운동의 과정은 여타 작품들과 다르게 묘사된다. 이 감독이 누차 말한 것처럼, 이들의 '찬란함'을 담기 위하여 화려하고 스타일리쉬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그동안 접한 룩과 다른 비주얼로 만들었어요. 사실 일제 강점기는 우리에게 승리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시절과 그 당시 인물들을 생각하면 암울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저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슴속으로 뜨거움을 느꼈고 찬란한 승리의 순간들을 묘사하고 싶었어요. 마침내 실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쥰지'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 시대 아픔을 회고하는 방식으로도 우리가 그 시절 얼마나 뜨겁게 희생했고 버텨왔는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영화 '유령'은 여성 캐릭터들을 적극 활용하며 작품의 세계관을 넓혔다. 극 중 여성 캐릭터들은 인물 간 관계부터 액션 등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마음껏 깨부순다.
"말씀하신 대로지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성별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의식이 있으면 위계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아서요. 그런 개입 없이 인물로서 받아들여지길 바랐고 성별로 읽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군가 이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극장 스태프였던 이주영이 극 말미 '유령'이 되는 모습 또한 '여성'이 아닌 세대교체에 관해 말하고자 한 거예요. 세대가 교체되고 바통을 이어받는 거죠. '쥰지'가 대를 물려 가며 싸워보라고 예단하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대를 이어받아 끝까지 싸우고 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인물 간 관계도 그러하다. 행동 대원인 '난영'과 유령인 '차경' '강옥'은 서로를 구원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유령'을 가로지르는 정서이기도 했다.
"'난영'은 '차경'을 견인하기도 하지만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인물이죠. 임팩트가 있는 배우가 필요했어요. 이솜 등장을 허투루 묘사하지 않고 귀히 여기겠다는 마음으로 담아냈어요. 극장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난영'과 '차경'의 모습은 영화의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했어요. 극장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두 여성, 얼굴에는 빗물이 쏟아지고, 극장 간판 불빛, 얼굴에는 황금색이 반짝이고……. 제겐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던 거 같아요. 슬픈 뉘앙스로 영화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겼죠."
해당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도 신중히 선곡했다. 극장에 걸린 '상하이 익스프레스'의 주인공인 독일 출신 가수 겸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의 음악을 사용했다. 1933년을 살아가는 '차경'과 닮은 데가 있어서였다.
"당시 유명했던 배우들은 소위 말하는 섹스심벌로 불리며 소비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디트리히는 여성성으로 소모되는 배우가 아니었거든요. 성별을 초월하는 '멋짐'이 있었어요. 이 멋짐을 담고 싶어서 디트리히를 출연시켰고 그의 음악을 썼죠."
음악과 관련한 비하인드도 일러주었다. 이 감독은 마를렌 디트리히의 음악을 조금 더 한국적 감성으로 채우고자 했고 고민 끝에 한국 재즈보컬리스트를 섭외하게 됐다.
"마를렌 디트리히의 음악을 쓰고 싶었는데 조금 더 센티멘털한 느낌을 담았으면 해서 재즈보컬리스트인 문혜원 씨를 섭외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의미를 담은 곡입니다."
영화가 처음 공개되고 극 중 인물들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들이 뒤따랐다. '난영'과 '차경'의 관계성에 관한 것들이었다. 관객들은 우정과 사랑 그리고 동지애 등 여러 감정으로 읽는 듯했다.
"관객들 반응을 보고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요. '아, 다양하게 보시는구나' 싶더라고요. 그건 모두 관객의 몫이니까요. 이 자체로도 다 옳습니다. 제 의도에 닿아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만 '차경'이라는 캐릭터를 두고 제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쉽사리 이 사람을 안다고 생각지 못하길 바라요. 더 큰 사람이길 바랐거든요. 쉽게 속단하지 못하고 조금 더 이야기하는 인물이 되길 바랍니다. 관계에 있어서 저는 제 나름대로 명확히 명시했다고 봐요. 완벽히 친절하지는 않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