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자는 일당 더 받는데만 관심있다고? 천만에

2022-08-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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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만 외친다고 노동해방이 실현되지 않는다-

[이두수 건설노동자]

성년과 미성년의 차이는 나이가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 여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차이라고 본다. 나는 노사연의 <바램> 노래 중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노랫말을 좋아한다. 나는 이 말이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져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건설 현장의 인부들 나이가 점점 고령화하고 있다. 건설 현장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노령화하고 있다. 노랫말대로라면 우리는 자기 생각을 자기만의 표현 방식대로 제대로 표현하는 성숙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지금 성숙 사회로 가고 있는가.

멀리는 세월호 해상사고, 가까이는 광주 화정동 아파트 붕괴사고는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졌고 국민들의 안전 의식이 높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정동 아파트 붕괴사고는 같은 회사가 전년에 비슷한 사고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났다. 왜 그럴까? 사고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안전에 대한 관심과 문화가 확산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고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을 추진하기보다는 사건을 이슈화하고 정치적인 이해득실로 이해관계자들의 설전으로 마무리되는 느낌이 든다. 세월호 사고로 우리 사회의 안전은 더욱 공고해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안전보다는 뭔가 정치적 구호의 난무와 이에 따른 증오와 반목의 사회적 갈등 요소만 더 증폭된 것 같다. 지금은 대선이 끝나 약간은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이 무더위가 지나면 사람들은 또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다음번 총선 때까지 이합집산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내 세대는 아직도 구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정의, 공정, 해방, 민주 이런 말에는 뭔가 부채가 있는 듯, 지금도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리에 나서기도 하며, 함께하지 못할 때는 마음의 부채 의식도 든다. 그렇게 구호 앞에 휘둘리며 살아왔다. 정의와 공정 그리고 해방이라는 구호 뒤에서 어떤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모순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비굴함도 배우면서 말이다.

아무리 ‘○○개혁’ ‘혁신○○’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고 사회가 혁신되지는 않는다. 생산 현장에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노동해방’이란 투쟁의 붉은 띠를 두른다고 해서 노동자가 해방될 리가 없다. 역시 변화는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개개인 노동자가 노동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면 노동의 생산성과 노동의 질이 높아진다. 본인의 노동에 대한 가치가 바뀐다면 노동을 단지 시간당 노동력의 환금성만을 높인다는 의식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그 행보의 첫 번째가 노동자의 자존감 높여주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발전이 이해관계자 간 대립과 반목 그리고 투쟁에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가치에 대한 인식과 노동 구성원들 간 존중과 상대 높여주기 같은 아주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데는 성실함과 의지가 필요하다.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에서 최진석씨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난 독후감에서 그는 페스트를 그냥 하나의 병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즉 정해진 마음, 정치적 진영, 종교적 독선, 편견과 고정관념 등등이라고 해보자 했다. 이러한 것들이 넘쳐나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런 페스트와 맞서 싸워 존재론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싸우려는 의지와 성실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실성이라는 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에 진실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라고 했다. 건설노동자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기 위한 투쟁 의지와 성실성을 갖기 위해 건설 현장에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현장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해 본다.

나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꾸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하는 동료들 모습, 현장 분위기를 주로 그린다. 일하다가 만난 근로자에게 그림을 그려주면 다들 기뻐하고 그림을 소중히 간직한다. 일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일 자체를 높이 평가해주고 일하는 모습을 존중해준다는 의미여서 가족이나 주변에 자신의 일을 설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 그림으로 같이 일하는 근로자들과 서먹했던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고 때로는 나에게 선물을 주는 분들도 있어 그림은 내게 좋은 인간관계를 맺게 해 주는 도구다. 나는 그림을 통해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만남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현장엔 작업 시작하기 전 TBM(Tool Box Meeting) 시간이 있다. 어느 날 직영팀 김 반장이 이 시간에 하모니카를 구성지게 연주했다. 현장과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묘한 분위기. 그렇지만 연주자는 나름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는 듯 매일 새로운 곡을 연주했고 사람들은 기분 좋게 감상했다. 현장소장이 이 하모니카 연주자에게 5분만이라도 전체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분은 더 좋은 연주를 위해 더 열심히 연습할 것이고 틈틈이 주말엔 공원에서 작은 연주회라도 열 것이다.

우리 할석 팀장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할석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까대기한 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로댕이나 미켈란젤로가 자기가 작업한 작품을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그런 모습을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느낀다. 천재적인 작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작업 현장에서 마치 예술가가 된 양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장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몽골에서 온 빌게는 자국의 빈곤 아동을 지원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교육 지원을 하는 단체를 통해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매월 정기적으로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본인도 돈을 벌기 위해 해외에 나와 있는 처지지만 더 어려운 자국의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 그에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가끔 후원 아동에게서 감사의 편지가 오면 그것만큼 힘을 주는 게 없다고 한다.

어느 노동 현장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을 것이다.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재능에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예술적 재능, 인문적 깊이 있는 역량들이 풍부하게 잠재해 있다. 근대국가 형성과 인권 향상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 독립선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한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으며, 생명권과 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은 이러한 권리에 속한다.’ 우리 헌법 10조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노동 현장이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장이 아니라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존중하며 각자에게 잠재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된다면 우리 노동 현장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할까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노동해방‘이라는 구호에 너무 휘둘려 왔다. 노동자를 단지 일당을 받기 위한 품팔이라는 의식으로 규정하고 노동자를 임금 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노동해방이 임금을 좀 더 받아내자는 운동이나, 제대로 일하지 않고도 돈을 받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보다는 노동자에게 잠재된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자존감을 높여준다면 그 노동의 결과는 생산성뿐만 아니라 생산의 질부터 다를 것이다. 나의 노동으로 누군가가 행복해한다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고 자기실현을 해나가는 그런 경지에 이른다면 이것이 진정한 노동해방이 아닐까. 이런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일하는 현장에서 부실 시공이란 일어날 수가 없다. 노동을 통해 각자 삶과 비전을 높여나가며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노동 현장을 꿈꿔본다.
 

[아침 조회하기 전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노동자. 개인 취미라도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공사 현장이 삭막한 전쟁터가 아니라 예술이 흐르고 정이 넘치는 곳이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조금만 배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5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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