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은 폐를 살짝 건드리며 심장에서 겨우 1인치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당시 취임한 지 두 달을 갓 넘긴 70세 고령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날 암살당하는 5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는 걸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는 인근 병원에서 1시간 넘게 총탄 제거 수술을 받았다. 로하이드 다운(Rawhide Down: The Near Assassination of Ronald Reagan)
현장에서 체포된 저격범은 정신병력이 있는 대학 중퇴자 존 힝클리 주니어였다. 영화 ‘택시운전사’(1976)를 15번 이상 보며 10대 창녀로 출연했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던 힝클리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영화의 주인공 트레비스 비클(로버트 드니로)처럼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힝클리는 이후 재판에서 심신 상실 상태를 인정받아 형사 처벌 대신 워싱턴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감돼 치료를 받았다. 2016년부터는 당국의 보호관찰 아래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노모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됐다. 현재 67세인 힝클리는 지난달 자택 보호관찰에서도 풀려나 41년 만에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보호관찰 중 유튜브 채널과 트위트 등을 통해 기타 연주와 노래 등 예술적 재능을 뽐내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번 달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다. 표가 매진되었지만 주최 측은 안전을 이유로 공연을 취소했다.
브래디 총기 규제법
힝클리가 발사한 독일제 22구경 리볼버 탄환 중 첫 발은 제임스 브래디 당시 백악관 대변인의 왼쪽 눈 위 이마를 뚫고 들어갔다. 뇌 손상이 너무 심해 의사들도 고개를 흔들었고, 당시 주요 방송사는 초기에 브래디가 사망한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수술과 재활을 거듭한 결과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반신불수가 됐고 휠체어에 의지해 여생을 보내야 했다. 18개월에 걸친 치료와 재활 후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퇴임한 1989년 1월까지 대변인이라는 타이틀 유지했지만 상징적인 백악관 복귀에 불과했다.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유머 만점인 명대변인으로 기자단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브래디는 아내 새라의 도움으로 불행과 좌절을 극복하며 새로운 소명을 찾아냈다. 새라 브래디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전국을 돌며 총기 규제 운동에 앞장섰다. 총격범 힝클리는 댈러스의 한 전당포에서 위조신분증을 제시해 29달러를 주고 권총을 구입했다. 그는 사건 6개월 전 지미 카터 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총을 갖고 비행기에 타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브래디 부부는 제대로 된 신원조회를 의무화하는 총기규제법 추진을 위한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평생 총기협회 회원이었던 레이건 대통령도 브래디 부부의 총기 폭력 방지를 위한 켐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의회는 총기 구입자에 대한 전과 조회를 위해 대기 기간을 의무화한 '브래디 총기 통제법'을 탄생시켰다. 1993년 11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휠체어에 앉은 브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법안에 서명했다. 2000년에는 백악관 서관(웨스트윙)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브래디 프레스 브리핑룸'이 신설되기도 했다. 그는 2014년 8월 73세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아내도 8개월 후 그의 곁으로 떠났다. 그러나 '브래디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이 미국 총기협회 로비와 압력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지난 5월 뉴욕주 버펄로 식료품점에서 10명,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이 사망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국에서 총기 규제 강화 요구가 거세졌다. 마침내 지난달 미국 의회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초당적 합의로 18~21세 젊은이들이 총기 구매 시 신원조회를 강화하고, 당국이 위험한 인물로 판단되는 사람에 대해 총기를 일시 압류하는 '레드 플래그'법을 도입하려는 주(州)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법안을 의회 표결로 통과시켰다. 헌법에 의해 개인에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매년 수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다. '브래디법' 탄생 이후 거의 30년 만에 미국에서 총기 규제에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인 것이다.
힝클리가 쏜 두 번째 탄환은 경찰관 토머스 델라한티 (Thomas Delahanty)의 척추를 관통했고 그는 왼팔 마비로 경찰을 결국 은퇴해야만 했다. 레이건 대통령을 가로막는 총알받이가 된 매카시 비밀 경호 요원은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나 심각한 후유증 없이 건강을 회복했다. 제리 파 요원과 더불어 대통령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매카시 요원은 경찰 간부로 오래 일하다가 2020년 은퇴했다. 원래 매카시는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당일 자기 근무 일이 아니었으나 워싱턴 힐튼 호텔 대통령 오찬 행사 직전에 요원 한 명을 추가 배치하라는 상부 지시에 비번이던 다른 동료 요원과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진 벌(?)로 호텔에 긴급 배치됐다.
레이건의 응급실 유머
레이건 대통령은 총상을 입은 직후 4분 만에 인근 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미국 언론에 보도된 소위 레이건의 '응급실 유머'는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내부 대량 출혈로 약 40%에 달하는 혈액을 잃은 심각한 상태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을 담당한 의사 조셉 지오다노에게 물었다. "당신은 공화당원입니까?" "오늘, 우린 모두 공화당원입니다." 간호사들이 지혈을 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 몸에 손을 대자 "우리 낸시(아내)에게 허락을 받았나?"라고 농담을 했다. 병원 의료진은 1㎝도 되지 않는 총알 자국을 발견했고, 1시간 10분 만에 총알은 제거됐다. 수술 직후 아내 낸시 여사에게 "여보,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duck)"라고 다독인 일화도 너무나 유명하다.
레이건 대통령은 응급실에 모인 침통한 표정의 보좌관들과 경호원들에게 "할리우드 배우 시절 내 인기가 이렇게 폭발적이었다면 배우를 때려치우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해 응급실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생사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대통령의 재치 있는 유머와 용기는 연일 미국 언론의 주목과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남긴 일기장에는 낸시 여사에 대한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일기장에 "난 눈을 뜨자 낸시를 발견했다. 그녀가 내 앞에 보이지 않는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녀를 나에게 준 것은 신이 내게 내린 축복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적었다. 1994년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이 알츠하이머병 확진 판정을 받은 사실을 대중에게 솔직히 알려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0년간 투병한 끝에 2004년 6월 5일 향년 93세로 작고했다. 낸시 여사는 전국을 돌며 남편이 앓던 알츠하이머병 퇴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2016년 3월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아내였던 마미(낸시 여사 애칭)는 12년 먼저 숨진 '로니'(레이건 대통령 애칭) 무덤이 있는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서관 뜰에 함께 묻혔다.
힝클리의 총격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크게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배우 생활로 갈고닦은 그의 원숙하고 위트 있는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한테서도 호감을 얻게 만들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번뜩이는 유머로 국민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집권 8년간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미·소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최대 무기는 그의 뛰어난 대외 소통 능력이었다.
레이건 혁명
레이건 대통령 취임 전후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 침체)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고질적인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벌이면서 세금 인하와 과도한 규제 철폐, 작은 정부를 내세운 소위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미국을 친시장 경제로 복귀시키고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경제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은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를 무척 높게 평가하는 경제학자들이 많다.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 시절 임명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인기 없는' 고금리 정책을 끝까지 지지했다. 볼커 의장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무자비한 금리 인상과 경기 후퇴(recession)을 택하면서 미국은 1983년부터 비로소 물가를 통제할 수 있게 됐다. 1981년 8월 경제 불황 시 미국 항공 관제사들이 대규모 불법 파업에 나서자 단호한 대처로 노동개혁과 법치주의 수호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던 레이건 대통령은 강력한 압박과 끈질긴 대화로 소련의 붕괴를 유도하며 명실공히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했다.
무엇보다도 빼놓지 못할 레이건 대통령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반규제·친시장·친기업정책일 것이다. 1980년대 '레이건 혁명'으로 미국 스타트업과 민간기업들은 새로운 '창조적 파괴'를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했다. 현재 세계 최고 기업으로 우뚝선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등이 이때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권 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사라졌던 낙관주의, 역동성, 기업가 정신이 되살아난 것은 분명하다. 레이건 대통령 퇴임 시 지지율은 63%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았다.
힝클리가 정신질환을 앓지 않았고, 1981년 그날 독일제 22구경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많은 미국 전문가들이 지금도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