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美고용 시장 …금리인상 안전판?
미국에서는 가솔린과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소비자들 지갑 사정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지만 고용시장은 의외로 탄탄한 모습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문제가 아직도 심각한 상태지만 경제가 금리 인상과 통회 긴축 충격에도 급격한 침체에 빠지지 않고 순항할 것이라고 믿는 구석이다. 노동부 통계를 보면 올해 5월 미국 실업률은 역사적 저점에 가까운 3.6%에 불과하다. 연방정부의 대규모 보조금 지급과 기업의 임금 인상 덕택에 2020년 3월 이후 증가한 미국 가계의 총 초과 저축액은 2조5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러한 막대한 규모의 가계 저축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 성장의 메인 축인 개인소비지출을 끌어올렸다. 지난 2년간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견고했던 주된 이유는 소비자들이 기업들이 파는 제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소비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이 현재와 같이 고공 행진을 계속한다면 가계의 초과 저축액은 곧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실제 고물가는 미국인들의 실질 수입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상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개인저축률은 14년 만에 최저치인 4.4%로 하락했다. 이는 지난해 12월에 비해 2분의 1, 1년 전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저소득층 가계는 이미 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그들은 이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선 저축한 예금을 인출해야 하는 형편인 것이다.
현재 미국 가계 총 초과 저축액 규모를 볼 때 미국이 당분간은 급격한 소비 위축을 걱정할 단계도 아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생필품 가격 급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위기를 극복하고 급격한 경기 후퇴 없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에겐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축 없이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경제 침체가 현실화하면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증시가 추가로 폭락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학계와 재계는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 침체) 재발 가능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들면서 비관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로 미국 경제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제 주요 관심사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다가올 고통의 시간일 것이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베스터 콘퍼런스에서 막대한 규모의 코로나 경기 부양책으로 주머니가 두툼해진 미국 소비자들의 지출은 아직도 강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는 정상적인 형태의 경기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인플레이션과 저축률 하락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앞으로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버틸 수 있는 소비력(spending power)이 남았다고 경고했다. 마켓 리서치 전문인 NDP 그룹이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 10명 중 8명이 향후 3~6개월 동안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비 감소는 월마트(Wallmart)나 타겟(Target) 등 대형 유통기업들의 수익 전망뿐 아니라 미국 경제에 전반에 먹구름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소비 감소 전망과 더불어 연준의 돈줄 죄기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미국 경제의 둔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경제가 침체의 문턱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이먼 CEO는 "알다시피 지난주에 내가 경제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바꾸려 한다. 그건 헤리케인"이라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최근 미국 경제에 대해 느낌이 "몹시 나쁘다(super bad)"면서 채용을 전면 중단하고 직원을 약 10% 감축해야 한다고 밝혔다가 바이든 대통령의 비판에 직원 수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연준의 '빅스텝' 물가 우려 잠재울까?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물가 상승세가 코로나19 대유행에서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다가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치솟고 공급망 병목현상까지 겹치는 등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인플레이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시인했다. 지난달 31일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회동해 인플레이션 대처 문제를 논의한 것은 미국에서 물가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월에 이어 6월 그리고 7월까지 3연속 '빅 스텝'을 예고한 연준 일각에서는 물가 안정을 전제로 오는 9월 금리 인상을 쉬어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지난 10일 발표된 5월 미국소비자물가지수(CPI)가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면서 9월 이후에 고강도 통화 긴축이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과 더불어 연준은 보유 채권과 국채저당증권(MBS) 등 자산을 매각해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는 대차대조표 축소 작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연준(Fed)은 앞으로 매달 국채와 MBS를 475억 달러씩 축소하고 오는 9월부터는 두 배인 950억 달러씩 자산을 줄일 계획이다
아마도 현재 월가의 투자가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시나리오는 연준이 금리를 빅 스텝으로 연달아 올려도 성장만 더욱 둔화될 뿐 물가는 잡히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한국도 1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물가와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제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민생 안정 대책으로 저소득층 현금 지원과 일부 품목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등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물가 잡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특히 외부 환경에 취약한 구조인 한국 경제는 가계부채 문제 악화와 기업 실적 악화, 금융위기 등 최악 상황에 대비해야 할 때다. 현재 전 세계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두말할 필요 없는 물가 잡기다. 나라마다 고용과 성장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물가를 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또 고물가 시대 탈출 전망과 해법에 대한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과 분석가들의 의견도 서로 엇갈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비둘기파' 학자들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경기 침체를 굳이 유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임금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해 소비자들의 실질소득은 이미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고물가를 잡기 위해 일부러 경기를 둔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대표적으로 전 영국은행 통화정책위원회 위원을 지낸 경제학자 대니 브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는 세계 경제가 이미 침체의 길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추가적인 금리 인상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비둘기파' 학자와 달리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고금리와 경기 불황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각국이 근로자에 대한 임금 인상이나 대출 증가 또는 저축 감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고통의 순간을 잠시 뒤로 미루게 할 뿐이며 결국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더 높은 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특히 기업들이 숙련 노동자와 원자재 부족으로 늘어난 수요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 제품 가격 인상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재현?
현재 세계 경제를 살펴보면 여러모로 1970년대와 유사하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 정책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인플레이션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시대다. 애덤 포즌(Adam Posen) 피터슨연구소(Peterson Institute) 소장은 한때 월가에서 '최고의 비둘기(uber-dovish)' 경제학자로 꼽힌 인물이다. 그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기고한 칼럼에서 지금처럼 물가가 강하고 광범위하고 오를 때에는 중앙은행이 의도적으로 불황을 유도해야만 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동시장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실질소득 감소가 인플레이션을 완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 IMF 수석분석가인 켄 로그오프 하버드대 교수는 세계 경제의 소프트 랜딩(soft landing) 전망이 갈수록 요원하다고 분석했다. 스티브 로치 미국 예일대 경영대 석좌교수도 연준이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면서 미국 경제가 내년까지 이어지는 깊은 침체가 유발될 것으로 경고했다. 현재 미국 고용시장이 의외로 탄탄해 인플레이션 극복과 연착륙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1970년대 상황을 보면 타당성이 희박하다. 당시 'wage price spiral(임금·물가 순환 상승)'은 미국 기업의 생산성만 후퇴시킬 뿐이며 근본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슈퍼 매파'로 이름을 떨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등장한 이후다. 그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무자비한 금리 인상과 수백만 노동자들의 해고 사태까지 감수하는 경기 후퇴(recession)를 택하면서 비로소 물가 통제가 가능했다.
현재의 고물가 현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는 가운데 포즌이나 로그오프, 로치 등 유명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우리 앞에 매우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은 우선적으로 코로나 사태로 너무나도 많이 풀려버린 돈일 것이다. 그 돈이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유령으로 변해 세계 경제를 혼쭐내고 있다.
(미니 박스)
세계 경제 10년간 더딘 성장?
지난 10일(현지시간) 노동부가 발표한 미국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8.6%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CPI 상승률이 3월(8.5%)에 정점을 찍고 4월(8.3%)에 이어 5월에도 어느 정도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완전히 빗나가면서 지난해 말부터 고공 행진하는 물가를 잡고 안정된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하려던 백악관과 연준(Fed)에 비상이 걸렸다. 조 바이든 행정부 경제팀은 최근 연준의 금리 인상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손상된 글로벌 공급망의 회복세에 힘입어 인플레이션 유령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펼쳤지만 예상 밖으로 고물가 시대 장기화를 시사하는 이번 5월의 물가지표에 적지 않게 실망하고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이번 발표로 인해 글로벌 경제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와 더불어 장기간 나타났던 물가 급등과 경기 둔화, 즉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향하고 있다는 세계은행의 경고는 더욱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온다. 세계은행은 올해 글로벌 경제성장 전망치를 4.1%에서 2.9%로 하향 조정하면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위축된 투자로 인해 10년간 더딘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subdued growth will likely persist throughout the decade because of weak investment in most of the world)"고 전망했다. 이번에 발표된 5월 CPI 수치는 40여 년 만에 최대 폭 상승치로 연준의 금리 인상과 통화 긴축은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물가 안정은 최우선 과제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에너지·식량 등 원자재 부족 사태로 물가 급등세를 통화정책으로 잠재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