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엔低 장기화에 흔들리는 '안전자산신화'

2022-04-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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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요즘 엔화 약세 현상을 놓고 일본에서 말들이 많다. 엔·달러 환율은 3월 30일 현재 달러당 122엔 수준까지 상승하였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4일 115엔에 비해 6% 정도 상승하였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면 아베노믹스가 한창 추진되던 2015년 6월 125엔대에 근접한 수준이다. 환율 등락은 당연한 현상이다. 더구나 앞에서 보았듯이 과거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등락을 하였다. 일본은행은 디플레이션을 타파하기 위해 양적완화와 제로 금리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엔저를 유도하는 것을 암묵적인 정책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데 실제로 엔화 약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왜 그럴까?

첫째는 엔화 약세의 긍정적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엔고로 인한 부작용을 뼈져리게 경험한 국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나타난 엔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제의 경쟁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엔고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 개발과 비용 절감을 하는 과정에서 생산성과 임금 상승의 선순환을 달성하지 못한 채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로 금리 정책, 더 나아가 양적완화 정책을 단행하였고 엔저를 유도하여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2015년 6월 달러당 125엔 정도 환율은 이러한 정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음이 점차 명확해져 가고 있다. 왜냐하면 아베노믹스를 통해 엔저를 유도했지만 기대했던 선순환, 즉 엔저→수출 확대→기업 수익 개선→기업 투자 확대→고용 및 임금 상승이라는 선순환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엔저로 인한 부작용이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더 강한 듯하다. 엔저는 수입물가 상승을 불러오기 때문에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피폐해진 일반 서민의 생활경제는 유가 급등과 식료비 증가로 인하여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엔저로 기대되었던 수출 확대와 무역수지 흑자 기조 정착 기대도 흔들리고 있다. 제조업체들의 해외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의 수출 증가에도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수출을 확대하는 국내 제조업들은 혜택을 보지만 중소기업과 수입업체는 비싸진 원자재 값으로 인하여 오히려 피해를 보게 되었다. 2021년 일본의 무역수지는 2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는데,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대중 무역적자가 증가한 점이다. 중국에 대한 투자가 늘고 부품소재의 현지 조달이 증가하면서 대중 수출 품목이 감소한 반면 중국에서의 수입은 크게 늘어난 것이 원인이다. 유럽연합(EU)과의 무역도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되었는데 2019년 발효된 일·EU EPA로 와인 등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제조업의 수출 기반이 약화하면서 엔저를 활용할 수 있는 일본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화된 것이 분명해졌다. 코로나 이전 엔저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코로나는 이러한 효과조차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저가 가속화된다면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둘째는 통화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은 벌써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였다. 연준은 보유 자산 축소와 같이 더욱 적극적인 통화정책 정상화도 추진할 예정이다. 영국은 이미 세 차례 연속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였고 유럽중앙은행도 양적완화 축소를 개시하였다. 반면 일본은행은 여전히 양적완화를 지속한다는 방침이며 국채 금리 상승에 대응하여 무제한 매입 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차이는 미·일 간 장기 금리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미·일 간 10년물 국채 수익률 격차는 연초에 1.5%에서 최근 2%까지 확대되었다. 미·일 간 금리 격차 확대는 최근의 엔화 약세를 유발한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금리 격차의 근저에는 일본은행 통화정책의 방향성이 있다. 양적완화를 지속한다는 일본은행의 정책 방향에 대해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자원 가격의 상승 등 인플레이션 압력이 예상보다 더 크고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엔저가 초래하는 앞서 말한 부작용이 가세한다면 일본의 통화정책 정상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셋째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도된 엔화의 안전자산 신화 붕괴에 대한 우려다. 엔화는 무슨 일이 터지면 피난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 역할을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질 때 엔화의 가치는 오히려 더 올라가는 경향성을 보여 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대지진, 코로나19 위기 시기에 이러한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엔화를 가지고 있으면 최소한 가치가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대외순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조업을 가진 국가의 통화이므로 안전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나타난 엔화 환율 동향은 이와 정반대였다. 엔화 가치는 오히려 하락세로 반전되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여러 가지 분석들이 쏟아졌다. 유가 상승으로 인하여 발생한 거액의 무역수지 적자 발생, 주요국 금리 하락으로 인한 엔캐리 트레이드의 약화, 일본의 해외 자산 유동성 하락 등 다양한 원인들이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일본 사회가 가장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서 결국 엔화는 위험할 때 보유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라는 투자자들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엔화는 장기에 걸쳐 실질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 한 나라의 통화가 다른 나라의 통화와 비교하여 얼마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지표가 실질실효환율이다. 일본의 실질실효환율(2010년 100)은 1990년대 중반에 약 150 정도로 정점을 찍은 후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67.55로 1972년 이래 50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추락한 상태다.

한·일 관계 악화와 코로나로 인하여 양국 간 교류도 매우 저조하다. 그 영향으로 필자도 일본 현지에 못 가본 지 벌써 2년 넘어가고 있다. 일부 통계나 경제지표만으로 그 사회의 실태를 다 파악하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세계가 물가 상승을 걱정하는 와중에 유독 일본은 아직도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나라다. 환율까지 엔저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 간 임금과 물가에도 더욱 격차가 벌어져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우려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우려가 더해질 수도 있다. 자국 통화가치의 하락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은 단 하나다. 돈을 풀거나 환율을 조정하는 것과 같은 꼼수가 아니라 교육과 기업가 정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제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정성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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