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2)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2022-03-3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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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상 수많은 외부의 침략에 맞서 싸워 독립을 유지해 온 나라이다. 두 나라 국민들 모두 민족정신이 강했고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이 강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충의 열사들을 후세에 널리 알려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20세기에 한국과 베트남은 냉전과 식민주의 종식의 마지막 종착역이 되었고, 두 나라에 모두 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전쟁 영웅이 있다. 바로 백선엽 장군과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장군이다, 두 장군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들에게 대하는 예우는 사뭇 다르다. 두 장군은 모두 자국의 군(軍) 창설에 참여했고, 각각 한국과 베트남 최초의 대장 출신이며, 100세를 넘겨 장수하였다.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 1950년 육군 제1사단을 이끌고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쳐 백척간두(百尺竿頭)의 대한민국을 구했다. 1953년 7월 23일에는 32세의 나이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 1월 31일에는 대한민국 최연소로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1941년 정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0년 만에 귀국한 호찌민 주석과 함께 중국 국경 지방의 까오방성, 빡보 동굴에 혁명지휘소인 전초기지를 구축하여 1945년 8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까오방성에 비엣민군사훈련소를 설립했고, 1944년 12월 22일 34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해방군선전대를 조직했다. 현재의 베트남인민군의 전신이다. 당시 무기라고는 권총 2정, 장총 17정, 화승총 14정, 기관총 1정이 전부였다. 8월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보응우옌잡 장군은 베트남 임시정부의 내무부장관, 국방부 차관, 군과 민간자위대 총사령관을 맡았다. 1947년 7월부터 국방부 장관에 보임되었고, 1948년 5월 28일에 37세의 나이로 베트남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80년 2월까지 국방부 장관직을 수행하였고, 1954년부터 1982년까지 정치국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 베트남 인민군총사령관, 1955년부터 1991년 은퇴하기까지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겸임하였다. 1954년 5월 7일에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83년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종식시킨 장본인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아시아국가가 유럽국가와 싸워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보응우옌잡 장군이 2013년 10월 4일 향년 102세로 사망하자 베트남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하노이의 10월 뜨거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빈소를 찾아 헌화하는 조문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길가에 늘어선 조문 행렬이 2km 가까이 되었고, 외신기자들이 이를 취재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도 TV에 방영되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장군에 대하여 각별한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베트남국민들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백선엽 장군은 2020년 7월 10일 향년 100세로 사망하자 묘지를 서울현충원이냐 대전현충원으로 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방 전에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 후 만주군 간도특설대 활동을 했기에 친일파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묘지를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현충원 논란’은 ‘역사 바로 세우기’냐 ‘역사 뒤집기’냐의 논란이었다. 일부에서는 친일파 군인들의 반민족행위가 한국전쟁 때 세운 전공만으로 용서받을 수 없다며 서울현충원 안장을 반대하였다. 결국, 백선엽 장군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는 참전용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장군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당시 민족주의 지도자로 이름 높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가 되었다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권력을 잡은 김일성으로 인해 고향 평안남도를 버리고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백선엽 장군은 군사학을 연구하고, 영어 구사 능력과 업무에 충실한 덕택에 미군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되어 숙군작업을 할 때, 남로당 관련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박정희 소령(훗날 박정희 대통령)을 구명해 주었다. 당시 군대에서 좌익을 척결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은 철저하게 무너져 공산화의 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자유와 민주의 기틀을 놓았다면, 미군과 교섭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은 사람이 백선엽 장군이다. 대한민국이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성장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백선엽 장군의 공로가 크다. 서울현충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할 인물이지만, 친일 프레임으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장군을 폄하시켰다. 베트남과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장군의 헌신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유지될 수 있었건만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은 한국전쟁에서 패하여 한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전락했기를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트남은 보응우옌잡 장군의 조국에 대한 헌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곳곳의 주요 도로를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였다. 이는 베트남의 낙후한 경제, 열악한 무기와 부족한 병력을 가지고, 현대화되고 잘 조직된 강대국과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독립과 통일을 달성한 장군에 대한 예우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최고, 최초, 최장기, 최장수 등의 수식어가 없이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베트남 최초의 대장, 최초의 총사령관, 최장수 국방부 장관, 최장수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1944년 12월 22일 베트남 해방군선전대를 창설한 이후 1991년까지 50년 가까이 베트남군을 육성하고 지휘하였고 국방정책에 관여하였다. 그 가운데 30년간을 베트남 인민군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아마 세계역사에 30년간 총사령관을 역임한 사람은 보응우옌잡 장군 외에는 없을 것이다. 2015년 2월에는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서 시내 중심을 잇는 고속도로를 준공과 동시에 ‘보응우옌잡 도로’로 명명하여 그의 헌신에 보답하였다. 기념 우표도 발행하여 보응우옌잡 장군의 충의, 애국정신을 널리 현창하였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영웅들에게 왜 그렇게 인색한가? 국적은 다르지만 두 전쟁 영웅이 평생 주장해 온,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한 마디가 뇌리에 박힌다. 위국충정(爲國忠情)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한 역사적인 영웅을 왜곡하거나 폄하시켜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

 

[보응우옌잡 대장(1911.8.25~2013.10.04)]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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