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우주탄생 비밀 푼 물리학자의 고향, 오데사에 평화를

2022-03-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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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과학작가, 언론인]


우크라이나 흑해변에 항구 오데사가 있다. 오데사는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이고 곡물 수출지로 유명하다. 세계의 곡창인 우크라이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밀이 흑해 항구를 통해 세계로 나간다. 오데사는 러시아제국 영토일 때 제국 내 두 번째 항구였다. 가장 큰 항구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러시아제국은 오랫동안 유대인을 차별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이우에는 살지 못하게 했기에 오데사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러시아제국 이전에는 오스만제국(터키)이 오데사의 주인이었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은 흑해를 둘러싸고 400년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지금은 기억되지 않는 이 오랜 전쟁의 첫 포성은 1568년에 울렸고, 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까지 양국은 모두 10번 전쟁을 벌인 걸로 전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밀고 당기는 세력권 다툼 끝에 오데사가 러시아 영토로 돌아온 건 1792년이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오데사는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2월 24일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으로 오데사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해변가에서 가까운 콘서트홀 앞에는 흰색 모래주머니가 둘러쌓여 있다. 오데사의 긴장된 분위기는 일본 언론인이 보여주는 현지 동영상 르포를 보고 알았다. 러시아는 오데사까지는 아직 쳐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오데사가 배출한 걸출한 물리학자가 있다. 조지 가모브(1904~1968)다. 그는 빅뱅 우주론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현재 우주를 이루는 물질은 90%가 수소와 헬륨인데, 왜 수소와 헬륨이 이렇게 많은지를 가모브는 알아냈다. 빅뱅이 일어날 때 특정한 조건 때문에 그렇다는 걸 그는 계산해냈다. 그러니 그건 빅뱅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가모브는 19살 때인 1923년 오데사를 떠나 레닌그라드(오늘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물리학 공부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독일 괴팅겐대학과 덴마크 코펜하겐의 이론물리연구소(소장 닐스 보어)로 유학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1928년 ‘양자 터널링’이라는 놀라운 양자역학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원자핵의 방사능 유출이란 미스터리한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 ‘양자 터널링’이란 해법을 내놓았다. 핵 안에 있는 물질은 핵력이란 장벽을 뚫고 방사능을 핵 밖으로 내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가모브는 양자 터널링이 일어난다면 그런 게 가능하다고 했다. 가모브는 양자 터널링을 교도소에 갇힌 죄수에 비유해 설명한 바 있다. 수감자가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벽에 몸을 계속 부딪힌다고 하자. 우리의 상식적인 세상, 즉 고전역학 세계에서 그는 탈출할 수 없다. 벽에 부딪힐수록 몸만 상할 뿐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무모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다. 양자 세계는 확률의 세계이고, 이에 따라 입자가 벽을 통과할 확률은 영(0)이 아니다. 그의 양자 터널링 현상은 이후 빅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조건을 설명할 수도 있어, 양자역학의 주요한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가모브의 이 연구는 소련 당국에서 극찬을 받았다. 1929년 봄 소련 공산당이 발행하는 신문인 ‘프라우다’는 가모브를 극찬하는 시를 실었다. “소련 사람이 러시아의 흑은 그네들의 플라톤이나 뉴턴을 몇 사람이나 낳을 수 있다는 걸 서구에 보였다”는 기사도 나왔다. 


 

[양자 터널링 현상. 고전역학 세계에서 에너지 장벽을 통과하려면 산꼭대기를 올라가야 하지만 양자역학 세계에서는 땅속에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듯이 입자가 에너지 장벽을 통과해 건너간다.]

그런데 가모브는 소련이 싫었다. 소련 당국이 과학을 자신들 이념의 틀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윈의 진화론과 정통 유전학, 심지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부정하던 나라가 소련이었다. 양자역학 연구에도 제한을 가해 양자역학의 두 가지 모델 중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연구하지 못하게 했다. 슈뢰딩거가 만든 ‘파동역학’만 사용하라고 했다. 가모브는 소련을 탈출하기로 했다. 지도를 놓고 탈출할 곳을 찾다가 흑해를 지목했다. 

흑해는 바다 크기가 한반도 두 배 정도다. 43.6만㎦다. 1932년 여름 크름반도를 출발해 정남향으로 내려가 터키 해안선으로 가려고 했다. 부인과 둘이서 작은 보트의 노를 움직여 250㎞를 내려가면 5~6일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가모브는 자서전에 “반짝이는 흑해의 파도를 헤엄쳐 가는 돌고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식으로 적었다. 탈출 계획은 실패했다. 36시간 만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나빠서 항해를 계속할 수 없었다.

가모브는 이듬해인 1933년 소련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흑해가 아니라 ‘하늘길’을 통해서였다. 그는 브뤼셀에서 열리던 당대 최고의 물리학 학회인 솔베이학회 초청을 받고, 어렵게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1934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워싱턴D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일했다. 여기에서 그는 초기 우주에서 수소와 헬륨이 만들어진 ‘빅뱅 핵 합성’ 반응을 연구했다. 그는 이걸 ‘선사시대 우주의 부엌’에서 우주를 이루는 물질, 즉 수소 원자와 헬륨 원자가 어떻게 요리되었나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1948년 물리학 학술지 ‘피지컬 리뷰’에 ‘화학 원소들의 기원(The Origin of Chemical Elements)'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은 우주론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논문 중 하나가 되었다. 

연구를 같이한 그의 대학원생 제자 랠프 앨퍼는 이후 후속 연구로 이름을 날린다. 138억년 전 빅뱅 흔적이 현재 우주에 남아 있으며, 빅뱅 때 만들어진 그 오래된 빛은 절대온도 5도일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앨퍼의 예측은 1965년 미국인 천문학자 두 사람이 하늘의 모든 방향에서 날아오는 이상한 빛을 발견하면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 빛에는 ‘우주배경복사’란 이름이 붙었다. 우주배경복사는 빅뱅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학계는 받아들였다.

가모브가 이런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시대적인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핵물리학자는 모두 로스 알라모스연구소에 징집되어 핵무기를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스 알라모스에서 연구한 핵무기는 1945년 일본에 떨어지게 된다. 

가모브가 연구한 ‘빅뱅 핵합성’은 지금까지 얘기한 대로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던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풀어내는 데 기여했다. 21세기 물리학의 큰 문제는 암흑물질의 정체 규명이다. 가모브는 이 문제를 발견하는 데에도 디딤돌을 놓는 역학을 했다. 가모브는 또 한 명의 유명한 제자를 뒀는데, 그가 ‘암흑물질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베라 루빈이다. 천문학자인 베라 루빈은 1970년대 외계 은하를 관측하고 회전 속도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은하 바깥쪽 부분의 회전 속도가 너무 빨랐고, 이 회전 속도는 눈에 보이는 물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을 오늘날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베라 루빈의 조지워싱턴대학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조지 가모브다. 

조지 가모브 자서전이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 ‘창세의 비밀을 알아낸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2000년, 사이언스북스)라는 제목이다. 자서전 시작 문장이 독특하다. 우크라니아와 러시아가 얼마나 얽히고설켜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모브는 “내 족보에는 한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내 친가 쪽 몇 대조 할아버지가 외가 쪽 몇 대조 할아버지를 전투에서 죽이거나 또는 반대로 죽임을 당한 것 같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 쪽 조상 중 한 명은 러시아제국 육군 장교였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8세기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견되었다. 반란이 일어난 곳이 ‘자포리자’라고 나와 있어 어딘가 해서 지도를 찾아보았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큰 도시 중 하나다.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 강인 드네프르 강변에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인은 코자크인이라고 불렸고, 러시아제국 군인은 반란을 일으킨 코자크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가모브 친가 쪽 남자들이 외가 쪽 남자를 직접 학살한 건 아니고, 우크라이나인을 죽였다는 뜻으로 가모브는 ‘친가 쪽 할아버지가 외가 쪽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적어 놓은 듯하다. 그 반대의 경우, 즉 외가 쪽이 친가 쪽에 대해 어떤 살상을 했는지는 가모브는 자서전에 적어 놓지 않았다. 오데사가 무사하기를, 흑해 북해안에 평화가 빨리 돌아오기를 빈다.


최준석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뉴델리특파원 ▷카이로특파원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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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필드의 바다, 흑해에서 폭발한 원시적인 욕


흑해란 이름은 ‘검은 바다’라는 뜻이다. 이 바다는 지구상의 다른 바다와 다르다. 흑해는 해수면 가까이에만 산소가 있고, 깊은 물속에는 산소가 없다. 수면 150m 이하만 되어도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바닷속에는 황화수소가 녹아 있다. 흑해의 이런 특징은 원생이언 중기(12억년 전)의 바다와 비슷하다. 그걸 알아낸 연구자가 도널드 캔필드(Donald Eugene Canfield)다. 그는 덴마크 오덴세 대학교의 지질화학자이고, 연구 결과는 1998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나왔다. 그래서 흑해와 같은 구조를 가진 바다를 '캔필드의 바다'라고 부른다.

“원생이언 초기에 산소 혁명이 초래한 결과는 현대와 같은 세계가 아니라 대기와 해수면에 약간의 산소가 있고 심해에 황화수소가 녹아 있던,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낯설기만 한 이른바 중간 세계였다...흑해는 지구과학자한테 유명한 곳인데, 산소가 풍부한 표층수가 황화수소가 풍부한 다량의 물을 담요처럼 덮고 있기 때문이다.”(앤드류 놀의 책 <생명 최초의 30억년>)

‘캔필드의 바다’는 원시 바다에서 현재 바다로 진화한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다. 시아노박테리아라는 생명체가 광합성을 하면서 산소를 대기에 뿜어내면서 ‘대 산소사건’(Great Oxidation Event)이 24억년 전~20억년 전에 일어났다. 과학자는 대산소 사건으로 바닷속까지 산소 세례를 듬뿍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캔필드의 연구 결과, 깊은 바다는 20억년 전까지는 아직 산소가 쌓이지 않고 있었다. 당시 바다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달랐고, ‘흑해’와 같았다. 그러니 흑해는 아주 오래된 지질시대 바다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 바다다. 

흑해가 ‘캔필드의 바다‘가 된 건 남쪽에 있는 에게해(지중해의 동쪽 바다)에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흑해에서는 민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에게해의 바닷물은 밀도가 높아 흑해로 들어오면 흑해 저층으로 들어간다. 흑해로 흘러들어온 민물은 밀도가 낮아 바다 표면 가까이에 있다가 보스포러스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해협을 지나 에게해로 흘러나간다.

결국, 가장 오래된 원시의 바다에서, 원시적인 인간의 욕망이 표출된 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건이라고 하겠다. 

지난 18일 한국 기업 두 곳(DL이앤씨, SK에코플랜트)이 터키의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새로운 다리를 건설했고,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부겸 총리가 터키를 찾았다. 총리가 행사에 참여할 정도로 새로 건설한 차나칼레 다리의 규모는 거대한 듯하다. 3563m 길이로 세계 최장 현수교가 된 다리가 놓인 곳이 다르다넬스 해협 위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북쪽에 있는 흑해와 아래쪽에 있는 에게해를 잇는 좁은 바닷길을 이룬다. 다르다넬스 해협이 에게해와 만나는 지점의 오른쪽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하나인 트로이가 있었던 곳이다. 


최준석 과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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