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달러 패권을 흔드는 모습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며 반세기 동안 지속된 ‘페트로(석유) 달러’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우디, 달러·위안화 저울질? '페트로 위안' 앞당기나
월스트리트저널과 블룸버그 등 외신은 사우디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중국과 적극적으로 협의 중이라고 15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같은 사우디 측 움직임은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페트로 달러 시대’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다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페트로 달러 시대의 문을 연 사우디가 위안화 결제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흔드는 것이란 시각이다.
실제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 질서인 페트로 달러 시대는 1975년 사우디와 미국이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사우디가 달러로만 원유를 결제하는 대신 미국은 인프라 건설·기술 이전과 함께 안보 우산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후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달러 결제에 동참하며 페트로 달러는 공고해졌다. 이는 달러화의 중요성을 높이는 동시에 미국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전문가들은 사우디의 위안화 결제 움직임을 두고 “사우디가 미국에 '정치적'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의미를 축소하면서도 시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프랑스 제네랄리의 기욤 트레스카는 "지정학적 질서가 움직이는 시점에 (이 같은 움직임이) 일어났다"며 "사우디가 지금 할 수 있는 카드로 플레이를 하려고 한다. 이는 미국에 그들(사우디)을 더 고려해 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스웨덴 금융그룹 노르디아의 위톨드 바흐케는 "지난 몇 년간 달러화의 종말을 부르려는 시도가 많이 실패했다"며 "이는 단지 또 하나의 실패한 시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위프트 제재에 러 경제 꽁꽁···사우디 카드 꺼낸 시기 주목해야
그간 미국과 사우디는 경색 관계를 이어왔다. 바이든 정부는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빈살만 왕세자를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사우디가 개입한 예멘 내전에서 군사 지원을 중단했고, 사우디의 숙적으로 통하는 이란과 핵 협상 복원을 추진하는 점 등이 사우디 측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란 평가다. 미국의 증산 요청을 사우디가 단칼에 거절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했다. 고정환율제인 달러·리얄 페그제 아래에서는 달러의 약세는 사우디에 부메랑이 돼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그간 사우디는 페그제 덕분에 인플레이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막대한 국부를 쌓을 수 있었다.
다만 사우디가 이 같은 카드를 꺼내든 시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러시아에 가한 강력한 경제 제재, 특히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배제 조치가 사우디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에 충격을 줬을 것이란 의견이다.
블룸버그는 “일부 전략가들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고립으로 인한 경제적 파괴는 이들 국가에 새로운 긴박감을 줬다”고 전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인도, 사우디 등 국가들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달러 이외 지불을 금융시스템에 포함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중국이 위안화의 국제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와중에 위안화가 달러화를 대체할 선택지로 주목받고 있다.
뉴버거버먼의 칸 나즐리는 "인도나 사우디는 유럽연합이나 영국 수준의 미국 우방국이 아니다"며 "러시아와 무역을 하는 나라들은 제재가 모든 지불로 확대될 것에 대비할 수 있는 비상대책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포렉스닷컴의 매슈 웰러는 "몇 년 후에는 세계적으로 두 개의 금융 시스템이 병행될 수 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만의 움직임만으로는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분수령이 될 수 없다"며 "이것은 판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